작품과 인간|72년 노벨 문학상을 탄「하인리히·뵐」|안인길(건국대 교수, 독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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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작품의 세계>
「하인리히·뵐」의 수·단·장평 소설들이 다루는 「테마」는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쟁의 무의미함과 전후의 내면적 또는 외부적 고통이다. 이 두 가지「테마」가 항상 새로운 변주를 하며 작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뵐」은 인생의 진실을 문학적으로 옮긴다. 이때 불합리한 일이나 부정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겸손하게 우리 주위의 진실을 알린다. 그 진실을 영혼으로 끌어들인다. 외부의 인생을 내면의 정신으로 끌어 모인다. 인류가 생활하고 있는 사회를 관찰한다. 어떤 법에 순종하는가, 어떠한 운명을 경험하는가, 찬성과 죽음의 형태,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느끼는 현실 이상의 법칙은 없다. 그리하여 현실이 거칠고 폭력적이고 또 잔인할 경우 우리는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늘의 왕국을 약속할 수 없다.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거짓, 즉 부부 사이의 거짓, 학교와 교회에서 맺어지는 흉악하고 추악한 것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야 한다.
「뵐」의 작품은 대체로 이런 것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전쟁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상처를 입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 귀향, 우리가 전쟁에서 보았던 바와 귀향 할 때 겪어야 했던 일들을 써야 한다. 폐허와 그 현실을 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앙을 인류가 다시 겪지 말아야 한다는 목적에도 이 써야 하는 임무는 계속 적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의식하면서 「뵐」은 독자들을 이야기의 홍수 속에 밀어 넣는다. 『문학은 모두가 이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데 기초를 둔「뵐」의 문명 비판은 극 때문에 온 세계 독자들의 절찬을 받았고 불멸의 문학 세계를 창조해 낸 것이다.

<내가 만난 「뵐」>
「헤르만·헤세」가 1946년 소설 『유리알 유희』를 가지고 「노벨」상을 받은 지 26년만에 독일 작가 「하인리히·뵐」이 「노벨」상을 받았다. 「히틀러」가 일으켰던 전쟁은 「토마스·만」 「헤세」등의 망명 문학만 전쟁 후에 남게 했다. 그리하여 전후의 독 문단은 「영점에서 출발」이라는 뼈저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47년「한스·베르너」「피히터」가 몇 작가를 초대하면서 시작된 47년「그룹」이 옛 화려했던 독문 학파의 전통을 이으려고 하면서 폐허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리하여「뵐」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전후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49년 무의미한 전쟁 때문에 치러야 했던 값어치 없는 죽음은 눈앞에 두고 병사가 경험하는 육체적·도덕적 고통을 「휴매니티」에 넘치게 쓴 『휴가병 열차』의 성공은 전후 문학 성공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지적되고 있다.
필자는 69년 초「퀀른」「뮝어스도르프」의 「뵐」자택에서 그와 함께 몇 시간을 보낸 일이 있었다. 이 작품과 얽힌 이야기를 물었다.
일화가 있다는 것이다. 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중이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단다. 순찰 중이던 젊은 중위가 나타났다. 다행스럽게 깨어났다는 것이다. 『정지, 암호』하고 소리를 질렀다. 중위는 거짓 암호를 댔다. 「뵐」은 진짜 암호를 잊은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불안에 싸였다. 장교는 군법 재판에 회부할 수 있고 감옥이나 총살 현장으로도 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느닷없이 회중 전등을 얼굴에 비추더니 웃으면서 『당신은 언젠가 반듯이 이 저주스러운 전쟁에 대해 책을 쓸 것이야』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암호를 알려주었던 것은 물론이고 고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뵐」은 자기의 생명은 구하다 시피 해 준 이 다정스러운 장교에게 보답할 뜻에서라도 첫 번째 전쟁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점령군들은 그 나라의 문학도 독일에 들고 온 것 같았다. 사람들이 흔히 「뵐」의 짧은 산문의 형태를「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까지 한다. 그 말에 대한 그의 대답은『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식은 산문의 짧은 형태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 작가「클라이스드」에게서 배운 것이다. 「요한·페터·헤벨」, 그 외 많은 작가를, 아마 내가 읽은 모든 작품의 작가들이 내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외국 작가로는「도스트예므스키」를 되풀이해 읽었고 영국 작가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집필 중이라든가 구상 중인 작품을 물었을 때 그는『첫째로「라디오·드라머」다음으로 50대 독일 여인이 주인공인 소설 한편을 쓰겠다.
내용은 이 여인이 전쟁 동안, 전쟁 후, 또 현재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사는 진실을 쓰겠으며 「리테일」한 이야기들은 써 나가는 동안 내 기억, 읽었던 책들이 내게 준 영향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대답했다.
이 소설이 작년 7월에 나은『여인과 군상』(Gruppenbild und Dame)이다. 4백「페이지」나 되는 이 소설은 그의 소설로는 가장 방대하다.
이밖에 소설과 「라디오·드러머」가 많고 희곡은 『한줌의 땅』 단 한편 이다. 시는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발표된 작품만을 가지고 문제삼지만 작가로서는 쓴 것은 모두 중요하다. 시도 썼다. 곧 나올 것이다』고 말했다.
근착「디·차이트」지를 보았더니「베를린」 출판사에서 『「뵐」시집』이 나와「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았다.
「뵐」은 전후 독일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린 작가다. 소련에서도 유독 그의 작품만이 많이 읽힌다. 그리하여 그를 가르쳐 『「뵐」대사』라고 평한 자도 있다. 그의「노벨」 문학상 수상은 전후 문학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며, 화려한 독일 전통 문학과의 새로운 유대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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