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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美의 돈에 끌려가는 현실 슬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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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맵싸한 해풍이 이른 봄볕 위로 스쳐가던 지난 9일. 터키의 이스탄불 시내는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로 붐볐다. 그러나 하얀 바탕에 시커먼 글씨가 적힌 현수막이 시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사바하 하이르!(전쟁을 반대한다)" 네시간 남짓 시내를 도는 동안 20여개의 반전 현수막이 눈에 들어 왔다.

"겉으론 잘 드러내지 않지만 터키인들의 반미 감정은 보통이 아닙니다. 뚜렷한 명분 없이 이슬람 형제국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반발하고 있어요. 잠잠하던 쿠르드족을 발호시키는 문제도 그렇고요. "

교민 崔모씨는 지금 터키 정부는 전쟁을 밀어붙이는 미국과 국민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 사이에서 일종의 '쇼크'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국익을 위해 미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국민을 설득 중이다.

터키는 이라크 공격을 앞둔 미국으로부터 미군 6만2천명을 주둔시켜줄 것을 요청받았다. 정부와 여당은 미군 주둔 허용안이 1백% 통과될 것으로 확신하고, 의원들에게 "특별한 당론이 없으니 자유롭게 투표하라"며 크로스 보팅을 허용했다.

그런데 결과가 불과 몇 표의 근소한 차이긴 하지만 주둔 반대로 나왔으니 터키 정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의중을 알면서도 지역구 주민들의 반전 정서를 의식해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7일 미군이 터키 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흑해 연안 터키 항구에 전쟁물자를 하역해 이라크 북부로 운송을 시작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나오면서 터키인들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를 입었다.

"터키의 인서리크 공군기지에는 이미 미군 7천명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터키인들은 그들 보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군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터키가 무조건 미국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몰아가고 있네요. " 회사원 케말(41)의 불만이다.

터키는 미군 주둔을 허용해주는 대가로 군사지원 20억달러, 경제지원 40억달러를 제의받았다. 그밖의 잠정 지원 액수까지 합하면 1백50억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업률이 25%에 육박하는 터키는 국제통화기금(IMF)에 3백억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

이어지는 케말의 얘기. "이왕 미국에 몸을 허락할 바에는 3백억달러를 받아내 빚을 해결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또 이라크 북부의 모술.키르쿠크 유전지대가 과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만큼 이 참에 전쟁에 적극 참여해 이 지역을 수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주장은 많이 수그러들었어요. 전쟁은 무조건 안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터키 의회가 한번 부결시킨 안건을 재상정해 처리하는 데는 통상 1년이 걸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미국의 눈치 때문에 당장 며칠 내에 처리해주지 않으면 안될 처지다.

"결국 미군 주둔을 허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겠죠. 누구나 그렇게 믿고 있어요. 미국의 힘과 돈에 끌려가야 하는 현실이 슬퍼요." 한 시민은 한숨지었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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