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순교자像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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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 조각가 손으로 빚은 최초의 한국 순교자 성상이 발견됐다. 조각가 최종태(71.서울대 명예교수)씨는 최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옆 골목에 있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피정의 집' 외벽에서 열두 명의 순교 성인들 성상을 찾아냈다. 1956년 이 건물이 세워질 때부터 들어서 있던 성상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

지난 7일 수도원을 찾은 최씨는 "평소 이 동네를 지날 때마다 건물벽에 조각품 여러 개가 붙어있는 이 집에 저절로 눈길이 갔는데 들어와 보니 역시 한국 사람 손으로 조각한 한국인의 모습이 틀림없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인 최씨는 장익 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다 "성북동에 참한 조각들이 있는데 오래된 것은 분명하고 자꾸 마음이 쓰인다"는 말을 듣고 찾아나선 길이었다.

열두 성상은 벽돌 건물 3층 바깥 벽에 좌우 대칭으로 구성된 아치 모양 틀에 열 개, 2층 베란다 기둥에 두 개가 서 있었다. '79위 복자'로 받들어지는 한국 성인.성녀들 중 김대건 신부.조신철 가롤로.유진걸 아우구스티노.정하상 바오로.유대철 베드로.김효임 골룸바 등 열두 분을 뽑아 조각했다.

흙시멘트를 재료로 한 성상들은 보존 상태도 좋아 바로 어제 세운 듯 선명하다. 수도회를 창설한 방유룡 신부가 이 건물을 지을 당시를 지켜본 방학길 신부는 "유명한 조각가는 아니었지만 방 신부님이 평소 알고 지내던 젊은 조각가가 자원해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증언했다.

최종태씨는 "덩어리(매스)를 둥글둥글하게 처리한 솜씨나 겹겹의 옷주름 매무새,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표현 등 첫 눈에 서울대 조소과 출신 선배가 만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조소과 7회로 58년에 졸업한 최씨는 김종영 선생의 지도를 받던 50년대 초 선배들이 대부분 일찍 죽어 확인해 줄 사람이 없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몇 가지 단서는 남았다. 이 성상들을 제작해 납품한 '찬미사'의 대표 최찬정씨는 "서울대 김세중씨가 관여하는 등 서울대 조소과 졸업생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고 확인해줬다.

최종태씨의 서울대 조소과 선배인 최의순씨는 "조각 작품들이 명동성당 안에 있는 장발 전 서울대 교수의 '십사 사도' 그림의 동작과 유사한 점이 많은 걸 볼 때 서울대 조소과 출신의 장기은 선배 등 두 사람 이상이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이 열두 순교자 성상이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사유물로 보존돼야 할 가치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한국 조각사에서도 귀중한 작품이라고 반가워 했다.

미술평론가 김종근씨는 "윤효중.김경승의 기념비성 조각 외에는 별 작품이 없는 1950년대에 이만한 작품성을 지닌 인물상이 제작돼 이렇게 잘 보존돼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작품을 만든 조각가를 발굴하는 일은 미술사 연구자들의 몫"이라고 했다.

최종태씨는 "한국 순교 성인들을 조각한 작품들이 한국의 조각가들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점 외에 최초로 건축물에 설치된 점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정재숙 기자

<사진 설명 전문>
서울 성북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피정의 집’에서 사십칠 년 만에 ‘열두 순교자 성상’을 발견한 조각가 최종태씨가 “한국 사람 손으로 조각한 한국 순교자의 첫 성상”이라며 기뻐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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