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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대한민국이 만난 세 가지 '잉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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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피어린 발자취를 더듬은 한수산 작가의 최근 저서 『꽃보다 아름다워라, 그 이름』을 읽다가 새삼 나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작가는 1836년 12월 김대건·최방제와 함께 조선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돼 6개월간 걸어서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한 최양업(1821~1861) 신부 이야기도 책에서 다루었다. 흔히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은 40세에 경북 문경에서 과로로 선종했다. 최 신부의 흔적을 찾아 서울에서 홍콩은 비행기, 홍콩에서 마카오까지는 배로 ‘속도와 편안함이 어우러진 쾌적한 여로’를 다녀온 한수산 작가는 170여 년 전 소년들의 여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저 아득히도 멀고 먼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당신과 오늘의 우리는 청춘의 그릇이, 꿈의 그릇이, 떠나고 가 닿는 길의 그릇이 그만큼 달랐던가 봅니다.…지금 같으면 지친 몸으로 학원 거리를 오가고, 학교 앞 골목에서 나쁜 녀석들에게 돈이나 털리는 나이 어린 중학생인데, 어떻게 그 나이에 저 먼 길을 걸어 마카오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만 15세 나이는 ‘청소년’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청소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이와 어른 사이 어중간한 기간 없이 결혼이나 관례(冠禮)를 통해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고 어른 대접을 받았다. 평균수명이 무척 짧았던 시대라 일찍 어른 되는 게 자연스럽기도 했다. 1906~1910년 통계를 기초로 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은 24세. 요즘 같으면 남자는 군대 다녀온 대학 복학생, 여자라면 갓 취직했거나 대학원 다닐 나이다. 그러나 조선의 남이 장군은 만 27세에 병조판서가 됐고, 서재필이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킨 때는 갓 20세였다.

 갑자기 웬 고릿적 나이 얘기냐고 할지 모르겠다. 요즘 젊은층의 문화현상으로 떠오른 ‘잉여(剩餘)’ 때문이다. ‘남아도는 인생’ ‘낭비하는 청춘’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라 한다. ‘88만원 세대’ ‘삼포세대’에 이어 요즘의 청춘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잉여 현상을 다룬 영화·서적·월간지가 줄줄이 나오고 ‘잉여짓’ ‘잉여롭다’ 같은 파생 조어도 등장했다. 잉여에서 내가 느끼는 첫 이미지는 패배주의, 체념, 자조(自助) 아닌 자조(自嘲), 과보호, 유아성, 의존성 따위다. 그러나 한편으로 탈근대의 징후들, 나아가 캄캄한 속에서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으려는 생기발랄한 창조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귀착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세 종류의 ‘잉여’를 만났다. 첫째는 50년대에 미국이 제공한 ‘잉여 농산물’이다. 55년 한·미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에 막대한 양의 밀·원면·보리·쌀이 들어왔다. 국내 식량생산 기반을 무너뜨렸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당장 때울 끼니가 없던 처지에선 배부른 소리였으리라. 나도 한국·미국이 악수하는 도안이 찍힌 ‘악수표 밀가루’의 혜택을 입은 추억이 있다.

 둘째 잉여는 한 세대 뒤인 80년대 대학가에서 호시절을 만났다. 자본주의가 노동의 잉여가치를 착취해 제 배를 불린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잉여가치설’을 통해서였다. 당시의 ‘사회과학’은 곧 좌파이론을 의미했다. 배경에는 군사독재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민주주의에의 강렬한 희구(希求)가 깔려 있었다.

 셋째로 부각된 요즘 청춘들의 잉여는 산업화·민주화 세대가 지닌 근대의 틀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배고픔을 해결하자는 것도,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전반적 시스템의 문제이자 탈근대 저성장사회에 맞는 체제를 갈구하는 욕구로 해석될 수 있다. 어쩌면 요즘 청춘이 진짜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취직 안 된다’가 아니라 ‘뭘 해도 어차피 빤한 인생이다’는 게 아닐까. 50년대 잉여가 신생 대한민국을 부양하고 80년대 잉여가 절차적 민주화를 이뤘다면, 2010년대 잉여는 산업화·민주화를 넘어선 제3의 길을 기성세대가 내놓으라는 몸부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이 산업화·민주화 세력으로 나뉘어 좀스러운 싸움만 벌이는 와중에 소중한 미래 세대가 시들어가는 것 같다. 열다섯 살에 큰 뜻을 품고 대륙을 횡단하던 시절의 기상·호연지기·야망 같은 덕목은 이제 고등학교 교가에나 남아 있는, 잊혀져서 서글픈 단어가 돼버렸다. 어른들의 책임 회피가 10대는 물론 20, 30대 청춘들까지 ‘만년 청소년’으로 만들어버렸다. 주변 곳곳에 ‘애늙은이’ 아닌 ‘늙은 아이’들이 보이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