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윤석오 제자|<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8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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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말년>
나는 이 박사에게 그가 싫어하는 말을 할때도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나의 직책마저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나는 내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아주 중단해버리는 것보다는 그나마 계속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4·19」 의거가 일어나고서부터 이 박사가 경무대를 떠나기까지의 1주일은 지금도 잊을 길이 없다. 나는 사태의 원인을 그에게 말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쳤다고 말했다.
북악산 중턱에 그를 두고 나는 떠나왔지만, 내 마음 한쪽은 그대로 그곳에 남아있었다.
이 박사 곁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주위 인물들은 달갑지 않은 얘기가 그의 귀에 들어 갈까봐 이를 감추려고 노력했다. 특히 국민들의 일상 생활상에 관한 것은 엄격히 차단됐다.
이 박사는 「6·25」동란이 끝난 후 몇년동안 「인플레」의 압력으로 국민들이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원 또는 환의 가치 절하를 막으려고 적잖게 고심하면서도 그 돈으로 어느 정도의 물건을 살 수 있는지는 몰랐다.
언젠가 그는 이발사에게 이발료가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이발료 인하 조치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발료와 비례하여 다른 물건값도 엄청나게 비싸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주위 용인들에게 돈을 줄 때도 40년대 말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소액을 큰 돈인양 주었다. 그가 주는 돈은 과자 값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돈에 관해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돈을
『미국 원조 몇 백만「달러」』하는 식으로 생각했지, 『담배 한 갑에 얼마』하는 식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이 박사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국가원수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교, 그것도 세 곳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우드로·윌슨」밑에서 정치학과 국제 정치를 배웠다. 그는 철저한 『「윌슨」주의자』였으며 좋은 의미의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이 박사는 세상을 생각함에 있어서 망상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증오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항상 국제법의 양식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 양식은 국제연맹과 함께 사라진지 오래이며 국제연합(유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돼 버렸다.
그는 「아시아」의 지역 동맹을 위해 누구보다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했다.
이 박사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은 「아시아」 반공연맹(APACL) 이었다. 54년 진해에서 APACL이 탄생하자 그는 이를 공산주의자 타도, 이 지역 평화 유지, 일본인의 세력확대 견제 등을 위한 일종의 「아시아」연맹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해에서 나는 이 박사와 함께 민간기구와 정부 수준의 기구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장시간 토론했다. 나는 그를 설득시켰다고 생각도 들었으나 그렇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이 박사의 생각은 한국의 주창으로 창설된 APACL이 국제 협정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국제 협정이 될 수 없는가』고 말한 그의 태도는 우직한 것만이 아니었다.
집단 안보는 「아시아」의 평화 보장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이 박사의 명확한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한국 국민과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했고, 또 그럴 수 있어야 했던 사람은 물론 이 박사였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줄리어스·시저」나 미국의 「리처드·닉슨」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박사가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본질적으로 선인이었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던 이 박사와 생활을 함께 했고, 비록 먼 거리에서지만 세계 여러 지도자들이 안고있는 문제를 지켜본 나였지만, 정직하게 말해서 이 박사나 그 밖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국가와 국민을 얼마나 알았을지 나는 알수가 없다. 유교에서 말하는 정적 세계는 현실에는 없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 정치는 「공화국」책장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매킨리」전 미국 대통령은 무릎꿇고 기도를 올린 후 미국을 「스페인」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미국이 「스페인」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그것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싼값에 승리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아마 기도야말로 훌륭한 것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 박사는 주위에 처져있던 성벽을 돌파하지 못해 모든 진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와 한국의 서민들에게 있어서 이 박사의 이런 과오는 결코 책할 것이 못됨은 어찌하랴.
그는 한때 이기붕의 손아귀에 놀아난다는 소리가 나돌 때에도, 통일된 한국을 이끌어 세계에 마련돼있는 제자리를 찾아 한국을 인도할 인물, 이 박사 자신보다 훨씬 위대하고 애국적인 인물을 항상 찾고 있었다. 이 박사가 찾았던 것은 언젠가는 분명히 열매를 맺고 말것이다.

<편집자 주="「경무대사계」와" 「그 여록」은 1백82회로 끝맺습니다. 다음 얘기는 「경평 축구 전」입니다. 집필은 전 평양 축구단 단장이었던 최일 씨가 맡습니다.> 【월리엄·글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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