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사계 여록(179)|한갑수<윤석오 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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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양자 강석>
이박사가 만송의 장남 강석군을 양자로 맞은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라 여기서는 입적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이박사 내의의 강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던가를 소개한다.
이박사가 노경에 접어들면서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는 한시를 쓴 것이 직접 계기가 되어 강석군이 양자로 경무대에 들어오면서 이박사 내의의 표정은 퍽 밝아졌다.
강석군이 육사를 졸업하고 미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프란체스카」여사가 서대문 만송택으로 전화를 걸어 박마리아를 대달라고 했다.
갑자기 웬일인가하고 궁금히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미국에 있는 강석군에게 생일선물을 좀 샀는데 서대문에서도 뭐 적당한 것을 하나 사서 같이 보내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이 때 서대문 생가에서는 강석의 생일조차 잊고 있었는데 「프란체스카」의 전학에 약간 당황하기까지 했다.
「프」여사는 미국의 강석군에게 퍽 자주 편지를 썼으며 때로는 영시를 지어 보내주기도 했다.
4·19 이후 만송 일가가 자살했을 때의 일이다.
4월 26일 이박사가 하야성명을 내고 아직 경무대에 그냥 있을 때 만송 일가가 자살·수도육군병원에 안치돼 있었다.
나 자신도 28일 아침밥을 먹다가 자살「뉴스」를 듣고 병원으로 달러갔기 때문에 혼자서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4·19가 일어나자 만송은 경무대에 들어가 뵙겠다고 몇 번씩이나 연락을 했지만 이박사가 웬일인지 만나주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25일 하오에야 비로소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아 만송이 경무대로 들어갔는데 불과 30분도 못 돼서 서대문으로 돌아왔다.
왕복시간을 빼면 실제 이 박사를 만난 시간은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만송은 그 때 전보문 한 장을 들고 힘없이 돌아왔는데 내용은 「맨치스터·이브닝·포스트」지의 발행인이 이 박사를 격려하는 것으로 이박사가 단보를 받자 기분이 좀 풀러 만송을 잠시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최인규 내무장관을 계속 수배 중이었는데 마침 최 장관이 서울 문리대 정문 앞 다리 위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해와 밤9시께 경호원 3명만 데리고 나가 최 장관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빨리 자수할 것을 권유하고 당분간 고생은 하겠지만 곧 다시 풀려나지 않겠느냐고 위로했다.
최씨를 만난 직후 나는 즉시 임시숙소로 쓰던 반도「호텔」로 돌아와 만송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약10분전에 어디론가 나갔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만송과 연락이 두절됐다가 육군병원에서 그의 시신를 대하게되니 정말 착잡한 마음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자유당계 인사나 만송친지는 한사람도 없었다. 나는 강석군의 친구 한사람과 28일 밤을 병원에서 새우고 29일 이박사의 방문을 맞았다. 곽영주 경무관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 박사는 대뜸 나에게 『어떤게 강석의 시체야』라고 물어 내가 두 번째 관을 가리키자 아무 말도 없이 관 앞에 부동자세로 앉았다.
이 박사는 만송의 관이나 주위는 일체 돌아보지를 않고 강석군 관 앞에서만 10분 이상을 묵묵히 앉아 있더니 『관에는 나신을 넣었나?』라고 한마디를 묻고 조용히 안치실을 나갔다.
강석군은 죽기 전에 이 박사를 찾아갔다. 27일 6관구 사령부에 숨어있던 만송은 27일 밤9시 6관구를 떠나 적선동에 있는 이무기라는 여자비서의 집으로 일가가 피신했다.
이날 강석은 혼자 경무대를 찾아가 이중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이 박사를 향해 『대통령 아버지, 강석이는 생가로 돌아가겠읍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거수경례를 붙인 다음 뒤로 돌아 경무대를 빠져나왔다.
아마 강석군의 이 마지막 모습에 이 박사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만송 일가가 이날 밤 경무대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박사가 4개의 관중 강석군의 관 앞에서만 앉아 있다가 쓸쓸히 돌아서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이박사 내외분의 강석군에 대한 사랑은 정말 친부모도 다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박사가 하야 후 새로 이인수씨를 양자로 맞아들였지만, 「프」여사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강석군의 경우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프」여사는 요즘도 식모를 두지 않고 손수 손자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으며 아기가 먹고 난 그릇은 꼭 비눗물로 끓여 소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도 「프」여사는 손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입맞춤을 하는 것을 아주 질색하며 가까이 가지도 못하도록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 박사 내외의 강석군에 대한 그 극진하던 사랑을 상기하게 되어 뭔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곤 한다. <계속>

<한갑수씨의 글을 끝맺습니다. 다음은 이박사의 대외문서작성을 도왔던 미국인 「윌리엄·그렌」씨의 3회에 걸쳐 싣고 경무대사계 여록을 끝맺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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