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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불 「옵새르바퇴르」지 「사회생태와 혁명」 토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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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발전의 현 단계에 있는 사회적 부와 파괴적 이용과의 사이에 빚어진 절대적 모순은 인간의 의식 속에 침투하기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조작된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소외된 노동이나 「레저」의 도구로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점은 절감하고 있다.
때문에 학생이나 노동자 등 청년층에서 기존체제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이란 이름 아래 자본주의 체제를 지배하는 모든 가치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그래서 이들의 반항은 급진적으로 자연과 기술의 환경탐구라든가 체제타파의 실험 토대가 된 「비전」의 탐구에 쓸리고 있다.
예를 들면 양성간·세대간·인간과 자연 사이에 소외됨이 없는 관계를 이룩하려는 미국「코뮨」의 시도이다. 또 그것은 거절과 혁신의 의지를 지탱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생태학적 운동은 자본주의의 생활공간을 공격하고, 또는 이윤과 생산적 낭비의 확대경향에 대하여 공격하는 행위이다.
어쨌든 오염에 대한 싸움은 도리어 기존의 체제 측에 포위되기 십상이다. 오늘날 『환경을 되살려 내자』라든가 『환경오염과 중독에 종지부를 찍자』고 내세우지 않는 광고가 거의 없다. 우리들의 환경을 더럽히는 그 책임자를 단속하는 위원회도 허다하게 생겨났다. 확실히 현실을 지양하려는 생태학상의 노력은 환경을 미화하여 한층 쾌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의 체제 측으로부터 선취한 것에 틀림없고 또 진보의 한 요소로서 지적된다.
왜냐하면 그 선취를 통하여 얼마만큼의 요구·요청된 사항이 자본주의 자체 속에 나타남을 불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행동과 경험 및 노동조건 등에 다소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은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경제·기술면의 요구는 생산양식 자체와 소비경향에 대하여 문제점을 제시, 고발하는 성격을 띄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생태학적 투쟁은 자본주의 체계를 지배하는 법칙과 충돌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는 ⓛ자본을 확대하여 축적하는 법칙 ②충분한 잉여가치의 창조 ③개발이라고 하는 소외된 노동을 계속할 필요성 등을 특히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하여 생태학적 투쟁은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선 지구의 구제가 불가능하므로 자본주의의 「모델」에 따라 제3 세계를 발전시킨다는 것 역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미와 비폭력과 평화의 세계로 확대하기 위한 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인간 환경으로서의 지구를 부흥한다는 명제는 단지 특권계급만의 낭만적·미학적·시적 발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인류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인류는 생산과 소비의 양식을 전환시켜 전쟁산업·낭비산업·삐뚤어진 산업을 폐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대신 노동을 가볍게 하고 창조적인 일과 즐거움이 있는 인생을 꾸미는데 필요한 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목표는 오직 복지에 있다. 그러나 과로와 과대한 소비를 교체하는 그런 복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가 빚어내는 공포·임금노예·폭력·악취·소음 등으로부터 해방된 인생이라는 뜻의 복지인 것이다.
문제는 더러운 것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비참을 은폐하며 악취를 없앤다든가 감옥과 은행과 공장에 꽃피우는-그런 것이 아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체해버리는 것이다.
오염과 중독은 물리적 현상인 동시에 정신적 사실이다.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는 규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스스로 내재하는 해방에의 본능을 강화해야 한다.
인간이 미와 추, 정적과 소음의 상위를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면 자유와 행복을 본질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이 인간의 환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본의 환경에 불과할 때 그것은 인간의 예속을 더욱 강화하는 데에만 이용될 뿐이다. 이러한 조건의 부가는 기성체제의 기본적 제 제도에 인한 것인 만큼 자연을 무엇보다도 유효한 개발대상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

<차례>
「맨스홀트」의 주장(상)
「마르쿠제」의 주장(중)
기타 학자들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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