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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19주년|조인에서 민통선북방 영농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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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휴전 19년-. 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 된지 19년만에 맞는 휴전기념일은 남북화해 「무드」속에 묻혔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된 후 처음 맞이하는 휴전19들은 동서해빙에 발 맞춘 남북화해 기운으로 4반세기 동안 동강난 조국의 허리에 핏기가 되살아나듯 감격에 젖어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첫 본 회담을 눈앞에 둔 적십자회담의 급진전과 7·4공동성명의 충격이 겨레의 가슴을 울리는 가운데 1백55「마일」 버려진 산하에 멎었던 동맥이 이어지듯 개발의 고동이 울리고 있다. 전문5조63항으로 된 정전협정이 이 땅에 포화를 멈추게 한지 약7천일-.
그 동안 3백31차의 군사정전위원회와 4백3차의 비서장 회의, 그리고 공동일직 장교회가 판문점에서 열렸다. 그러나 『열전을 막는 안전판』구실을 다하면서 또 한편으론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것』외엔 판문점에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욕설과 설전의 장군멍군만이 회의탁자 위에 교차했다. 이 같은 「테이블」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무력도발과 전쟁준비의 긴장만이 휴전선에 팽팽했었다.
유엔군 측이 항의한 북의 도발건수는 1만건에 달했지만 단 2건을 시인했을 뿐 우리 쪽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고 유엔군에 대한 북의 항의는 8만6천건에 이르러 유엔 측은 90여건을 시인했었다. 그러나 꽁꽁 얼어붙었던 휴전선의 긴장에 첫 변화의 신호는 5년 동안 판문점에서 자취를 감췄던 중공대표 하거약이 71년5월14일 군사정전위원회에 복귀한 것이었다.
미·중공 접근기류가 열을 올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로저즈」 유엔측 수석대표가 비무장지대 평화이용 5개항을 내놓은 것도 이때였다. 모든 군사시설을 없애고 버려진 땅을 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분단의 장벽을 허물자는 「로저즈」제의에 대한 북의 반응은 7개항의 평화제안이었다. 잇따라 「로저즈」의 2탄, 『유엔군 측 수석대표를 한국인이 맡아 한국사람끼리 대화를 갖게 하자』는 발언은 국내외에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8·15선언과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 찾기 적십자 회담제의는 휴전이후 가장 큰 이변을 가져다 줬다. 적십자 「마크」를 단 남북민간인들이 처음으로 민간차량을 타고 긴장의 건널목을 넘어 판문점에서 마주앉게 됐다. 그후 적십자예비회담이 1년에 24차까지 진행되어 서울·평양 왕래가 현실로 다가와 군사정전회의는 맥이 빠졌고 앙칼진 탁상설전은 사라졌다.
7·4성명 후 처음 열렸던 4백3차 쌍방 비서장 회의에서 한주경 북한측 비서장은 욕설과 선전은 일체 없이 사무적인 태도로 회의에 임했다. 이날 한은 아직도 「미 침략군」이란 말을 한두 번 썼지만 한국군에 대해서는 중상이나 욕설을 삼가 했다. 회의시간도 3백8차(66년1월20일)회의이래 가장 짧게 26분만에 끝났다.
휴전선 일대에 귀가 따갑게 울리던 전파전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비무장지대 남쪽을 향해 고성능 「스피커」로 갖은 욕설을 퍼붓던 대남 방송은 7·4성명이후 「괴뢰」니 「도당」이니 하는 용어를 「남조선」으로 바꿨으며 1주일에 약 4백번씩 되풀이하던 대남 정부비난이 약80회(5분의1)로 줄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으로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군의 대북 방송도 「북괴」란 말을 쓰는 대신 남북성명을 낳게 한 우리의 노력을 설명해 주고 있다고 국방부 당국자가 전했다. 긴장이 가시고 민족의 대동맥이 다시 이어지려는 태동과 함께 망향의 발길이 임진강변에 잦아졌다. 「자유의 다리」주변엔 하루 3백명 가량의 관광객이 2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몰린다. 지난 2월 준공 포장된 「통일로」는 실향민의 망향을 달래는 관광로로 트여 「통일의 찻집」까지 생겼다.
사람이 접근해도 날줄 모르는 꿩과 각종 야수의 낙원인 비무장지대와 「아카시아」의 「터널」,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대성동 마을 등 앞으로 관광자원으로 개발을 기다리는 명소들이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도 민통선 철폐로 인한 출입영농을 이주영농으로 전환키로 한 비무장지대개발은 휴전이후 가장 보람있는 휴전선의 변화가 될 것이다.
국토개발계획에 따라 추진중인 비무장지대개발은 현재 국방부에 개발계획 단이 구성되어 조사에 착수했으며 이미 신철원 지역에 시범 재 건촌이 건설됐다. 남방한계선 철책을 스치는 최전방까지 들어가 농사짓게될 농민들은 부락단위로 군의 지원을 받아 생산과 방어임무를 맡아 버려진 광대한 옥토를 전면 개발하게 된다. 지난 7월 10일 착공된 최초의 재 건촌 공사는 추석까지 완료할 예정이며 첫 입주는 약 1백 가구 정도, 벌써부터 인기가 높아 5대1의 경쟁이 예상된단다.
가구당 6천평씩 할애될 경작지는 현재의 연평균 40가마에서 50∼60가마로 수확도 불어날 것으로 내다보여 농민들의 기대는 부풀고 있다. <최규장 기자>

<판문점 10년 일지(1953∼1972년)>
▲53.7.27=만 2년17일의 협상 끝에 정전협정조인, 전투행위중지, 비무장 지대설치 등 발효
▲53.7.29=양군 4㎞ 휴전선 완충지대에서 철수
▲53.8.3=중립국 감시위원단 활동 개시
▲53.8.21=노금석 대위 「미그」15로 귀순
▲54.5.22=「제네바」회담에서 14개항 통한방안제시
▲56.6.9=중립국 감시반 철수
▲57.6.29=북의 군사력 증강으로 「유엔」측은 「무기 반입 금지 조항」폐기를 북에 통보
▲58.2.16=KNA(창랑호) 납북
▲59.1.27=「프라우다」지 이동준 기자 귀순
▲67.3.22=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 위장 탈출
▲68.1.23=「푸에블로」호 피랍
▲68.12.11=KAL기 납북
▲70.12.3=박순국 소장 「미그」15로 귀순
▲71.5.l4=중공대표 하거약 5년만에 복귀
▲71.6.23=「로저즈」 「유엔」군 수석대표 한인 교체발언
▲71.8.12=한적,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 회담제의, 북적 수락(8.14)
▲71.9.20=제1차 적십자예비회담개시
▲72.2=서울∼문산 통일로 개통
▲72.7.4=남북공동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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