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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제26화 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43)|김갑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 박사와 법원>(하)
김동현 대법원장의 발령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던 법관회의는 대통령으로부터 임명 거부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대구에 있는 이우익 변호사를 대법원장 후임으로 추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법관회의에서 추천한 사람은 거부하고 행정수반이 독단으로 후임을 정하고 법관회의가 이 결정을 따라야 한다면 벌써 사법권의 독립은 말살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우익씨의 적임여부는 둘째이고 우선 이 문제가 논의의 촛점이 되었다.
이우익씨 문제를 정식으로 법관회의에 상정하고 구 부결결과만을 대통령에게 통보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려니와 행정부와의 마찰만을 격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법관회의는 대표를 선출, 대통령과 면담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두일·배정현 두 분이 대표가 되어 이 박사를 방문했다. 두 사람이 이우익씨를 법관회의가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자 이 박사는 담담히 이야기를 듣고 알아보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알아본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이우익씨 문제는 차후에는 거론되지 않았다.
법관회의를 다시 열고 조용순씨를 대법원장 후임으로 의결했다. 당시 조용순씨는 법무부장관을 그만두고 사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조용순씨면 정부에서도 대가 없겠지 하는 것이 우리의 계산이었지만 어떻든 이것도 일방적인 추천만을 했다. 그 때문인지 조용순씨의 발령도 달을 두고 나지 않았다. 법관회의는 인내심을 가지고 하회를 기다렸다.
법관회의 계산이 들어맞았는지 이 박사는 그 고집을 꺾고 조용순씨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우리는 한숨을 돌리고 이 박사의 아량을 고맙게 생각했다. 이박사가 사법권의 독립을 존중해 준 것이 고마왔다.
법관 숙명인지 몰라도 재판이 여당에 유리하면 권력의 압력을 받았다 하고, 야당에 유리하면 야당계라는 말을 듣게 마련이다. 법관이 권력의 압력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당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유당 정부 아래에서 직·간접을 막론하고 압력으로 느낄만한 처우를 받아 본 기억이 없다.
더러 반공단체가 용공판사 물러가라고 시위도 하고 벽보도 써 붙인 일이 있고, 이것이 관의 비호 내지 묵인 아래 된 것이라면 권력의 압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이 공공연한 압력으로서 소위 권력의 압력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박사가 재판 결과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사건이 절무했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재판결과가 불여의한 경우에도 그렇다 해서 법관의 버릇을 고쳐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어느 기회에 이 박사와 단들이 대좌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 박사는 요새 법관들은 검찰에서 죄인을 잡아 보내면 마구 놓아주고 있으니 무슨 대책이 없겠느냐는 취지로 물었다. 이 박사는 그런 보고를 듣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망설이다가 대책 대신에 사법권 독립을 이야기했다. 이 박사는 별로 못마땅하다는 기색도 없이 나의 대책 아닌 대답을 듣고 있었다. 이 박사는 고집도 유명하고 배짱도 있었지만 그 배짱 못지 않게 인정도 있는 분이었다.
6·25사변이 일어 난지 얼마 안 되어서 대구에서 내무부장관의 교체가 있었다. 백성욱 장관의 후임으로 조병옥 박사가 발령되었다.
장관이 갈리면서 나도 그만 두게 되었고 인사차 지사관저로 이 박사를 찾아갔다. 피난시설이라 바로 거실로 안내되었는데 이 박사는 나같은 말직에게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 박사의 인간성의 다른 한 면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야당계 법관의 지칭을 맡기도 했지만 정권이 바뀌고 보니 야당계 법관이 아니라 실은 여당계 법관이었음을 스스로 발견했다.
헌법은 법관의 임기를 보장하고 있지만 그 임기에 불구하고 법관의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심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법관도 정권과 운명을 같이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은 나는 사표를 내고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닌 법관의 자리를 내놓았다.
7·29선거에 고향 안성에서 입후보를 했는데 별안간 정당을 택할 여유도 없고 해서 무소속으로 뛰어다녔다.
입후보자들은 선거연설을 한다고 이 박사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듣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나는 이 박사를 비관하기는 했지만 노 박사를 깍듯이 존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인심은 조석변이라는데도 별로 시비가 없었고 오히려 호평을 사기도 했다. 정치인의 눈에 비친 이 박사와 국민의 눈에 비친 이 박사가 달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화장으로 돌아온 이 박사가 정원에서 전지를 하는 모습은 제행무상을 되새기게 하는 정경이었지만 이이 박사 자신보다도 보는 사람에게 더 깊은 감회를 안겨 주는 것이었다. 전지에 여념이 없는 듯이 보이던 이 박사의 흉중을 오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회한과 울분, 그러나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한탄도 있었을 것이다.
이 박사와 겨루던 신익희씨가 급서 했을 때 사람들은 이 박사는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탄식을 했다.
조병옥 박사가 지체없이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김포를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또 한번 탄식을 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그것은 이 박사의 하야를 위한 하늘의 작희였던 것일까?
이 박사는 『못살겠다 갈아 보자』는 아우성 속에 조국을 등져야 했지만 그 아우성 속에서도 『쏘아서야 되나, 내가 물러나야지. 불의에 항거할 줄 모르는 백성은 희망이 없어…』하고 스스로 하야를 결정했다.
이 박사에 대한 회상에선 무어라고 한마디로 평가하기엔 너무 많은 엇갈림이 있는 것 같다.

<김갑수씨의 글은 3회로, 끝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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