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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개헌실비(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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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파경을 유발하게 한 국회와 정부의 대립은 이미 제헌국회 때부터 싹텄다. 그러나 건국초기에 적어도 국회 안에는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48년7월20일 국회에서 그를 재석 1백96명중 1백80표란 절대 다수로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승만 의장이 대통령이 되리라는 것은 미리부터 예측된 일이었고 대한민국에서 그를 제외하고 정치를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정도로 이 박사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8·15해방 후 반탁 반공투쟁을 통해 대한민국 수립에 앞장을 섰던 한민당은 처음부터 이 박사를 중심으로 한 집권을 생각했고 건국 후 조각때 반대급부로 자당의 다수 입각을 당연한 권리로 요구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이른바 국부로서의 초연한 입장에 서려는 생각에서 한민당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국회가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게 된 근본원인은 바로 여기서부터 싹텄던 것이다.
건국 초의 대거입각에 실패한 한민당은 국회에서의 제2대 대통령 선거를 건곤일척 반격의 기회로 잡았고 여기에 흥사·한독계가 가세한 것이다.

<거창사건 등 독단처리가 불씨>
한마디로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집권에 있는 만큼 「카리스마」적 재집권을 꾀하려는 이대통령과 이를 막으려는 국회 야당간에 빚어진 격돌이 정치파동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박사가 자기의 영도력을 과신한 나머지 국회나 다른 정치세력을 무시한 독선적인 통치수법이 국회와의 대립을 더 격화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다시 관계자들의 이야기-.
▲곽상훈씨(1, 2, 3, 4, 5대 의원·전 민의원 의장·현 육영재단 이사장·77) <나는 당초 이 박사를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조국 독립에 몸바쳐 온 박사의 외교솜씨는 정말 탁월했어요. 그러므로 그를 중심으로 모든 국민이 뭉쳐야만 완전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한거지요.
그러나 차차 지내보니 기대에 어긋납디다.
그분이 대통령이 된 후 조각인선에 실망했어요. 전혀 뜻밖의 인물이 장관에 등용되고 속된 말로 장관 한 자리 주는걸 제사지내고 제사 밥 나누어 먹기 하듯 하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 분은 자기의 영도력을 과신한 나머지 이 나라 이 민중은 그가 지도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갖고 있었고 다른 정치인을 어린애 취급했어요.
이같은 사고에서 그는 중요국사를 국회와 별 상의 없이 처리했고 국회에도 몇 번 밖에 출석하지 않았어요.
이 박사가 제헌 때 대통령 중심제로 하자고 주장할 때는 나는 찬성했습니다. 반토막 밖에 독립이 안된 현재는 한 사람의 영도자 밑에 뭉쳐야만 통일과업을 달성할 수 있다, 완전독립이 된 다음에는 내각책임제도 좋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 중심제로 하여 이 박사 밑에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러나 이 박사의 독선에 기대가 허물어져 제헌말기 한민당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았을 때는 개헌을 하고 또 이 박사를 갈아야겠다고 생각했읍니다.>

<종결단계서 대통령제로 돌변>
이승만 대통령의 이와 같은 독단으로 인한 부정이 국회의 반대세력을 부채질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 실례로 6·25직후 정부의 수도사수 선언을 들 수 있다. 26일에 국회도 수도사수를 결의하고 국회의장이 이 결의문을 전달하러 대통령 관저에 갔을 때는 이미 남하한 후여서 국회는 이 문제를 번번이 정치문제로 삼으려고 했다. 부산 피란시설 국민과 정국에 큰 충격을 준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도 국회의 대정부 공격에 더 기세를 올리게 하였다.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장정들에게 나누어줄 식량과 운영비 등 약70여억원을 횡령하고 많은 장정을 굶겨 죽인 방위군사건(주=본 연재242∼251회 참조)과 공비들과 내통했다고 거창군 신원면민 5백 여명을 처형한 거창사건(주=본 연재260∼271회 참조)이 드러나자 국회는 공화 구락부가 중심이 되어 대정부 공격태세를 갖추고 이승만 대통령 실각공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봉재씨(당시 공화구 소속 국회의원·현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장·62)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박사를 가장 존경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싫어했어요. 그것은 서로의 정치주장의 차이에서 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분의 독선이 싫었기 때문이지요. 나는 정치란 경제적으로는 국민을 배부르게 하고 군대를 튼튼히 해 외침을 막아야 하는데 박사의 정책은 경제발전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비난을 받을만한게 많았어요.
정치하는 과정에서 반대세력과 대립한다는 것은 주장과 주장의 대결에서 상호 발전하는 것이고 또 정치에서는 일단 화해가 되면 어제의 적이라도 오늘의 천구가 되는 법인데 이 박사는 자기 감정에 치우쳐 너무나 독선적이었읍니다.
이것이 정국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보고 있는데 거창사건·국민방위군 사건 등이나 그후에 국회가 대정부 공격에 단합하게 된 동기라고 볼 수도 있지요.>
한편 건국 초의 우리나라 정치세력 중 한독만계는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는 남한 단선이란 이유로 불참했지만, 처음부터 이 박사를 업고 나온 한민당도 곧 그의 반대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헌법제정에서 이박사의 반대로 한민당이 내놓은 내각책임제 헌법안이 관철 안된데다가 정부수립 후 첫 조각에서 그들의 입각교섭이 전적으로 무시되자 이 박사에 의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헌법을 고쳐 내각책임제 아래서 집권당이 될 전략을 세웠고 사사건건 이 박사와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윤영씨 총리지명에 더 실망>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10총선 결과 한민당은 표면상으로는 29석밖에 차지하지 못했으나 실제로는 70여 석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원내 제1당이었다.
5월31일 개원식에 이어 헌법제정 과업에 들어가자 제동작업은 기초위원장에 한민당의 서상일 의원이 선출되는 등 처음부터 한민당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유진오 전문위원에 의해 마련된 내각책이미제 헌법 초안을 원안으로 삼고 심의에 들어갔는데 15회의 토의를 거치는 동안 이 헌법 초안이 그대로 채택되어 종결단계에 들어섰다. 제헌국회가 구성되기 전부터 내각책임제 하에서 집권당이 될 것을 기대했던 한민당의 전략이 적중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승만 의장이 대통령 중심제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며칠 후에는 내각책임제 헌법 하에서는 아무 자리도 맡지 않고 야로 물러나 개헌운동이나 벌이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민당은 이 박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그가 요구하는 대로 하되 이승만 정부에서 국무위원의 과반 수를 차지할 방침을 세웠다.
이래서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에 대통령 중심제 요소가 가미된 기형적인 형태를 취하게 됐고 집권을 노리는 정치세력에 두고두고 헌법을 고치는 구실을 주게 됐다.
한민당이 다수를 차지한 제헌국회 말에는 한민당에 의해 시도됐고 흥사단계인 공화 구락부가 다수를 차지한 2대 국회 중에는 그 교섭단체에서 개헌공작을 추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박사가 초대 대통령이 되고 조각에 착수했을 때 한민당은 김성수 위원장을 국무총리로 하는 조각명단을 이 박사에게 제출하고 12부장관 중 8명 정도를 한민당 인사로 희망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예상외로 이윤영 의원을 총리로 지명하여 한민당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김성수 위원장의 입각교섭을 거절한 한민당은 이때부터 기회만 있으면 내각책임제로 고쳐 집권당이 될 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다음은 이 문제의 관계자 증언-.
▲유진오씨(제헌 당시 헌법 기초전문위원·전 고대 총장·전 신민당수·현 동당 고문·66) <정부수립준비가 한창일 때 한민당의 김성수 위원장이 나에게 당에서 필요하다면서 헌법초안을 만들어 달라고 합디다. 며칠 후에는 독립촉성회의 신익희씨가 또 하나 해요. 나는 구상하고 있던 내각책임제·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초안을 설명하고 『이것이 맘에 들면 공동안으로 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 내놓자』고 제의해 확답을 얻었읍니다.< p>

<이 박사, 대통령 중심제를 고집>
기초위에서 내 안을 채택해서 심의가 시작됐는데 하루는 이승만 국회의장이 기초위에 나와서 대통령 중심제가 좋으니 그렇게 만들어 주기 바란다고 말하고는 훌쩍 나가 버립디다. 그러나 기초위는 내각책임제로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며칠 뒤 이박사가 다시 기초위에 나와 『내각책임제 헌법 아래서는 나는 아무 자리도 맡지 않고 야로 물러나 개헌국민운동을 벌이겠다』고 합디다. 기초위는 허정 의원, 윤길중 의원, 나 등 3명을 보내 이 박사를 설득케 했읍니다.
이화장으로 찾아가 대통령 중심제는 국민과의 의사소통이 잘 안돼 자주 정변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설득했으나 이 박사는 끝내 이북에는 공산당도 있으니 정권안정을 위해 대통령중심제로 해야 된다고 합디다.
그후 신익희 부의장의 강력한 종용도 있고 해서 결국 대통령 중심제로 변질 됐읍니다.>
◆주요일지(1952년2월1·2·3·4일)
※2월1일 ▲휴전회담, 「유엔」군측은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구성국으로 서서「스웨덴」「노르웨이」 3국을 지명 ▲일본 길전 수상, 유임 퇴임설 부인 ▲「아이크」, 6월에 「나토」사령관 사임 발표
※2일 ▲6대의 적기, 중부전선의 아군공격 ▲경남북 9개 군에 비상계엄선포
※3일 ▲휴전회담, 공산측 9개 항목의 새 제안 제시 ▲「태프트」의원, 「트루먼」비난
※4일 ▲포로 교환 분위 회의 진전 ▲외무차관에 갈홍기씨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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