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북 직통전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미국 백악관의 지하실엔 상황실이라는 방이 있다. 키신저 외교의 산실이기도 하다. 세계의 외교만능시대를 만들어 낸 초 정보들이 여기에서 나온다.
이 지하실의 한 귀퉁이엔 색깔이 각각인 3대의 전화가 놓여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로, 또 하나는 북경으로, 또 하나는 NATO본부로 통하는 전화이다. 이 전화는 아침 6시면 꼭 실험통화가 이루어진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실험에 더러 진력이 난 요원들은 한때 시 낭송으로 대화를 대신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미국에선 로버트·프로스트 시를, 저쪽에선 푸시킨의 시를 음송했다. 정치 현실 속에서도 이런 로맨틱한 전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은 퍽 아이러니컬하다.
북경과의 통화는 이제까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몇 나라의 중계로 그것은 원하기만 하면 가능했다. 그러나 미·중공의 화해는 드디어 그 직통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이 모스크바와 이른바 하틀라인(Hotline)을 설치하게 된 것은 쿠바 사태가 직접 동기가 되었다. 각종 초 성능의 무기들을 갖춘 현실에서 대립국가들은 순간적인 착각이나 착오에 의해 전쟁을 일으키지 쉽다. 현대의 전쟁은 촌각이 승부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틀라인은 그 촌각의 착각이나 착오를 서로 교정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
비단 그 하틀라인은 미국의 정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독의 본과 동독의 심부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이미 화해의 기틀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그 직통전화는 서로 신뢰를 확인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뜻하지 않은 총성이 대치 선에서 들려왔을 때 그 직통전화는 총성의 진의를 타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 오해나 착오는 범하지 말자는 「심중의 선」을 연결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세계의 분단국 중에서 끝까지 침묵을 지켜오던 남·북한도 그 직통전화가 가설되었다. 이 지상에서 아직껏 같은 민족끼리 심중에 대화의 통로를 막고 있는 나라는 인지반도 뿐이다.
비록 군사분계선이 철망은 살벌한 채로 막혀 있지만, 그 너머는 대화의 선은 마련되었다. 우리는 그 선으로 같은 민족끼리 같은 목적에 의해, 같은 나라 말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새로운 역사의 통로로 끝내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제야 우리는 그 가느다란 동선 하나를 겨우 연결했지만, 그 선으로 우리는 태산 같은 일들을 풀어가야 할 것이다. 실로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