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이봉래 역<제자는 『해서암행일기』의 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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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월12일 계속>저녁에 서흥 남면 고방치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쉬며 소문을 들었다. <서흥 북쪽의 신당진 만호 이웅준은 여러모로 토졸 들을 괴롭히고 무모하게 수탈하였다. 군관 등에게 번드는 것을 면제해 주겠다고 구실을 만들어 한사람 앞에 좋은 비단 1필과 황구피 1장 및 참깨 한말을 받아들였다.< p>

<비단 값 더 받아내고>
또 토졸들에겐 거친 벼 한 섬을 주어 정미로 찧게 하고 쌀 6말씩 가져오라고 하였는데 작년에는 모든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쌀 6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토졸이나 백성들은 6말의 쌀을 채워 바쳐야 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소리가 매우 많았다.
훈련도감에서 사들이는 비단의 값은 본래 피곡 2섬에 백주(명주) 1필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만호는 정가 이외에 아무 것이나 방자해 다 받은 것이다. 뿐더러 둔곡을 나눠 줄 때에도 뇌물을 바치는 자에게는 많이 주는 반면에 기민에게는 사실상 몇 되 몇 홉으로써 말막음하는 정도로 그쳤을 뿐이다. 이상 「서계에서 발췌」

<군역에 원성 높아>
번드는 것을 면제한다는 명목의 제번목은 신당진만이 아니라 각 예읍의 관. 군관에 다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근거 없는 것이다. 그 중에 신역이 없는 군관에게는 비록 포목을 납부한다 하더라도 괜찮겠으나, 신역을 하는 사람마저도 명부에 올려 1인당 1필씩 납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중첩된 군역에 대하여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서 향교의 교생에게 제강목(수강료)으로 매년 2필씩 징수하는데 이것 역시 명목 없는 부당한 징수이다. 그런 부당한 징수로써 수령의 사복을 채우는 것은 해괴한 처사이니 만큼 앞으로 신역에 종사하는 군관으로부터의 수포와 교생으로부터 제강목을 수탈하는 등 그릇되고 사사로운 제도를 일체 혁파해야 할 것이다.- 이상「별단에서 발췌」
4월13일 맑다. 새벽에 출발하여 호산 서쪽에서 아침을 먹고 한나절쯤 호산 승천둔이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말먹이를 주고 있는데 주인이 무슨 일로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나는 의연히 흉년이라 관서지방에 간다고 말했다.
『행차를 보아하니 틀림없이 양반이신데 얻어 먹으로 다니시다니... 왜 수령벼슬이라도 하지 않으십니까』
『양반이면 다 뭘 합니까. 글도 못 배우고 무술을 닦지 못한데다가 가세마저 모잘 것 없으니 누가 벼슬을 거저 준답니까.』
『그렇지만 수령자리는 못한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둔별장(관아나 군의 경비 염출을 위하여 배당해 놓은 농토에서 현장관리 책임의 관원)이라는 자리가 있는데 상당히 좋은 자리든 걸요』
주인은 나더러 양반끼리는 길이 닿을 테니까 어서 손을 써서 감사에게 소청을 넣기만 하면 넉넉히 봐 줄만한 자리라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매우 솔깃하게 듣는 체 하며 그에게 물었다.

<창고지기라도 좋아>
『둔별장의 소득이 1년에 얼마나 되는걸 가지고 그러는 가요』
『아 그거야 묘리를 터득할 나름이지요.』
『묘라니요?』
『잘만하면 얼마든지 좋은 수가 있단 말입니다. 1년이면 곡식 1백석 쯤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니까요. 또 그것만이 아니라 개가죽. 참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얻어먹을 수 있는데, 그거야 다 자기가 꾀를 쓸 나름이죠』
『그 참 좋은 자리 군요. 그 둔별장 자리라면 정말 해봄직 한데요. 잘하면 쉽게 손쓸 수 있으니까 일을 꾸며 봐야 겠읍니다.』
주인은 아주 반색을 하며, 내가 과연 그렇게되어 이곳에 내려오게 되면 꼭 자기를 창고지기로 시켜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빈말이라도 선선히 말했다.
『암요. 둔의 덕분인데 그렇다 뿐이겠습니까. 창고지기도 그냥 괜찮은가요?』
『그렇지요 창고지기만 해도 어딘 데요! 그것도 곡식 수십 석을 내려가지 않는 걸요』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허허 웃었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오게되면 마땅히 약속을 지킬 것이나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올 수 있겠는지의 여부는 실지로 부딪쳐 봐야할 노릇이 아니냐고 말했다.
하지만 주인은 내 얼굴을 보고 또 보며 퍽 믿음직스러운 모양이었다.
『극력 하고자만 하신다면 왜 안될 일이겠습니까. 부디 그 자리에 오셔서 저와의 약속을 식언하지 않는다면 피차에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거듭 당부해 마지않았다.

<금산촌에 여장 풀어> .
늦게 백천 금산촌에 이르러 여장을 풀고 쉬었다.
4월14일 맑다. 새벽에 출발해 백천 화산 발산리 농가에서 아침을 먹었다. 새벽부터 끼기 시작한 안가 한나절이 되어서야 겨우 걷히었다. 10여리를 와서 김 서리가 어디 갔는지 영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어제 묵은 마을로 하인들을 보내어 그가 간 곳을 탐문케 했다. 하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말에서 내려 길옆 언덕 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앞을 지나가던 한 노승이 주척주척 다가왔다.<계속><이봉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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