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보다 먹먹해지는 쪽에 꽂혀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4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예비 후보작 19편에 한국 작품 ‘사이비’가 선정됐다는 소식이 지난 7일 들려왔다. 내년 2월 16일 최종 노미네이트된다면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은 물론 장편 영화로서도 첫 아카데미 진출이 된다. 이 작품은 지난해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 영화제에 진출했던 ‘돼지의 왕’을 만든 연상호(35) 감독의 신작. 충격적인 소재와 강렬한 비주얼로 ‘애니메이션 스릴러’라는 독보적 장르를 개척한 그가 이번에도 탄탄한 스토리와 팽팽한 긴장감으로 무장해 시체스국제영화제 애니메이션 최우수작품상 수상, AFI 영화제 애니메이션 단독 초청 등 화제를 뿌리고 있다.

그의 작품은 흔히 사회고발 애니메이션이라는 측면에서 새롭다고 언급되지만, 그가 높은 평가를 받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생생한 캐릭터와 익숙한 사회현실에 교묘히 빗댄 고도의 은유와 상징을 통해 인간의 감춰진 다층적 내면을 드러내 인간 존재를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다.

‘돼지의 왕’에서 계급사회를 살며 겪는 내면의 부조리를 학교폭력에 은유해 충격을 줬던 그가 사이비 종교를 통해 은유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불편한 진실과 달콤한 거짓말
진실은 대개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달콤한 거짓말을 찾는다. 돈 몇 푼에 천국을 약속받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어쩌면 뻔히 알면서도 삶의 무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인지도 모른다. ‘사이비’가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수몰 예정지역인 시골 마을에 교회가 생긴다. 장로를 사칭하는 사기꾼 최경석이 젊은 목사 성철우를 데려와 거짓 기적을 행하며 천국에 준하는 기도원 건설을 명목으로 수몰 보상금을 뜯어낸다. 그들을 유일하게 의심하는 건달 김민철이 진실을 파헤치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고, 결국 진실이 밝혀져 행복한 사람도 없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런 유의 종교 사기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거다. 하지만 ‘사이비’가 신선한 충격을 주는 이유는 작품 안에서 감독이 던지는 정교한 질문 때문이다. 여기 불편한 진실과 달콤한 거짓말이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우리는 달콤한 거짓말 없이 살 수 있을까?

“믿음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참과 거짓이 2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층위가 있다는 것을요. 참이냐 거짓이냐에만 집중하던 민철이 그사이에 있는 수많은 층위를 받아들이지 못해 무너져버린 뒤 결국 자신도 뭔가에 의지하는 모습이 관객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믿음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비난은 아니에요.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된 이유가 뻔히 보이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멍청이’라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다른 제안을 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얘기죠.”

‘당신이 믿는 것은 진짜입니까’라는 카피에서 자칫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는 종교비판적 내용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결코 종교 자체를 겨냥한 것은 아니다. ‘믿음’이 종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살면서 품게 되는 다양한 가치와 신념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다.

“힐링이나 자기계발이라는 주제, 정치적 신념도 일종의 믿음 아닌가요. 요새 들어 어느 한쪽을 택하라거나 신념이나 가치를 드러낼 것을 요구받는데, 옳고 그름을 따질 뿐 신념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중요시하진 않더군요. 그 가치를 갖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판단이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고 싶은데, 그걸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쉬운 주제가 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종교비판으로 비칠까 걱정은 돼요. ‘돼지의 왕’도 학원폭력은 은유였을 뿐인데 겉핥기로 소비된 터라…. 개봉에 맞춰 조용기 목사님이 측면 지원사격까지 해주셨지만(웃음), 종교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돼지의 왕’의 학교, 단편 ‘창’(2012)의 군대, ‘사이비’의 교회까지 그는 인간의 집단이나 조직 내부의 갈등을 소재로 삼아 왔다. 흔한 계급 간 대결구도가 아닌, 하위계급 내부에서의 미묘한 갈등과 심리묘사에 천착하는 것이 그의 장기다. 저항할 수 없는 거대 세력 아래 약자들끼리 부대끼다 돌파구를 못 찾고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의 치밀한 심리전이다.

“사람은 대부분 조직 속 개인으로 사는데, 조직을 강조하다 보면 생기는 조직과 개인의 충돌지점에서 생기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어요. 계급 간 갈등이나 조직과 개인의 싸움을 다룬 이야기가 많지만 그 내부의 비극이 더 영화적일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의 작품은 사회고발보다 정신분석에 가깝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디테일한 심리묘사와 마지막까지 긴장을 끌고 가는 서스펜스가 권선징악과는 무관한 내면적 비극으로 귀결되면서 단순한 카타르시스와 다른 복합적 감상을 만들어낸다. 희망은 없고 절망만 있는 세계관이 지나치게 암울하다는 반응도 있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도 있지만 반대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카타르시스를 좋아해요. 희망을 얘기하기엔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대충 뭉뚱그리고 싶진 않거든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체인질링’처럼 희망도 묵직하게 얘기하고 싶고, 그러려면 더 정교해져야겠죠.”

목소리 맞춰 그리는 사전 녹음 방식
그의 작업을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근본적인 의문이 고개를 든다.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실사로 구현하기 힘든 황홀한 판타지와 스펙터클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달콤한 거짓말’ 아니던가. 그는 왜 애니메이션이라는 꿈의 도구로 실사보다 더 리얼한 불편한 진실을 쏟아내는 걸까.

“일본의 콘 사토시 감독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애니메이션이란 뭐든 할 수 있는 장르인데 왜 로봇이나 미소녀 판타지만 만드는지 의문이라 대답했었죠. ‘반지의 제왕’을 왜 애니가 아닌 실사로 만들었느냐고 안 묻듯, 이제 애니로만 가능한 기술은 없어요. 애니 효과란 판타지가 아니라 표현방식의 문제라 생각해요. 예컨대 ‘사이비’ 인물들이 광기 어린 상황에서 짓는 표정 같은 것에 실사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 있거든요. 그만큼 애니는 더 예민한 도구라 생각하고, 그걸 알려가고 싶어요.”

‘사이비’가 놀라운 또 한 가지는 기존의 애니메이션 더빙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스러운 입 모양과 뚜렷한 캐릭터의 목소리 연기다. 비밀은 연 감독이 국내 최초로 시도한 사전 녹음에 있다. 영상에 목소리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돼지의 왕’ 때도 일부 사용했지만 ‘사이비’는 80% 이상 사전 녹음이다. 사전 녹음을 고집하는 이유는 영화적 시나리오에 걸맞은 리얼한 연기 폭을 보장하기 위해. 영화에서 애드리브가 중요하듯, 배우의 애드리브를 포함한 자연스러운 연기를 담고 싶어서다.

‘돼지의 왕’에 이어 출연한 양익준·오정세·박희본 등 개성파 연기자들의 목소리 활약은 과장이나 정형화를 벗어난 ‘리얼리즘 더빙’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할 만하다. ‘20년 연기인생 최초의 악역’을 맡았다는 권해효의 사기꾼 장로 연기도 관전 포인트.

“단순한 캐릭터였는데 권해효씨가 여러 가지 단면을 복합적으로 뽑아내 줬어요. 본인은 최초 악역이라지만 ‘시라노: 연애 조작단’에 동네 건달로 카메오 출연하셨을 때 엄청 무서웠거든요. 사람 좋은 역을 주로 맡지만 실제 권해효는 저런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사기꾼에 딱이다 싶었죠.”

한국 애니, 작아도 가능성 있는 시장
그의 작업은 제작비와 제작기간 면에서도 업계에 혁신 모델을 제시했다. 애니메이션은 대표적인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작품당 수십억원의 제작비와 4~5년의 제작기간이 걸리는 게 보통. 그러나 연 감독은 2011년 ‘돼지의 왕’, 2012년 단편 ‘창’, 2013년 ‘사이비’를 연달아 내놨고, 차기작 ‘서울역’도 이미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가 내후년 공개 예정이다. 예산 또한 ‘돼지의 왕’이 1억5000만원, ‘사이비’는 3억8000만원짜리 저예산 프로젝트다.

“하청회사에서 일을 배우면서 공정의 문제점을 알게 됐어요. 지금도 업계에선 100년 가까이 된 초창기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는데, 이제 기술로 공정을 최소화할 수 있거든요. 2D애니지만 3D모델링으로 작업량을 줄이는 등 우리만의 제작공정을 만들었기에 가능한 것이죠.”

어린 시절 만화광이었던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알고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꿨단다. 하지만 오히려 그와 대조적인 스타일 덕에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사이비’로 해외영화제에 가면 미야자키의 ‘바람이 분다’와 나란히 상영이 되는데, 두 영화 스타일이 너무 다르니 언론이 서로 비교하기 좋아하더라고요. 사실 진짜 영향받은 건 오토모 가쓰히로예요. ‘아키라’에서 친구이자 적인 인물들의 애증관계에 매료됐죠. 애니메이션이면서 엄청난 사유를 하게 만든다는 점이 경이로웠어요.”

일본 애니메이션의 파워가 엄청나긴 하지만, 한국 애니도 전혀 다른 시장을 만들 수 있다고 그는 단언한다. 산업이 비대해져 보수적 성향을 띠는 일본에 비해 우리는 신진 작가들의 새로운 스타일도 시장에서 통할 수 있기 때문. 극장 개봉 국산 애니가 한 해 한두 편에 불과한 열악한 현실을 이겨내고 있는 그만의 묘책은 ‘저예산’과 ‘브랜드’다.

“시장이 작으니 투자자와 의사소통을 많이 해야 해요. ‘돼지의 왕’ 예산이 작았다는 점도 ‘사이비’ 제작에 메리트가 됐죠. 기술적으로 미흡했던 부분을 두 배 정도 예산이면 커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투자배급사 뉴도 이 정도 리스크면 부담이 없겠다 판단한 거죠. 고마웠던 건 투자자 입장에선 작은 걸로 돈 되는 것을 만들자고 하기 쉬운데 그러지 않았다는 거예요. 연상호 브랜드를 키워가면 더 큰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큰 그림을 그려준 거죠.”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NEW, 스튜디오 다다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