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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부가 본 한국 불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서기 372년에 고구려에 들어온 불교는 금년으로 1,600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이 나라의 역사가 보여 주는 불교 즉 한국 불교는 정말로 찬란한 과거를 영광으로 생각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마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삼국시대로부터 고려말기까지 완전히 불교의 전형적인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 신라통일을 전후하여 불교의 교학으로 생각하면 영원히 빛날 만한 고승들의 업적들을 누가 잊으리오? 이 나라의 정신적 바탕으로 보아도, 이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영광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화로 보아도 불교가 전해 준 유산 이외에는 별로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왕실에 너무나 얽매여 귀족들과 임금들의 보호만을 믿어 이를 지나치게 이용해 오다가 고려시대의 불교는 형식에 치우쳐서 유학자들의 배불 정책을 당하고 말았다.
이조 초기의 태조기 여러 임금들이 개인적으로 불교를 신봉하는데도 불구하고 억불 정책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불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부귀에 혈안이 되어 노비 수백 명씩이나 각 대사찰에 데리고 있으면서 승단이 많은 과오를 범했다는 사실을 묵살해서는 안 될 것이며 따라서 배불 정책을 유교와 유생들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더구나 안 된다.
이유는 어떻든 간에 이조 5백년 동안 불교는 박해를 당하고 깊은 산 속으로 피해 들어가 차차 이 나라 사회에서 소외되어 침체되기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일제시대까지 겪고 난 한국 불교는 1945년 이후로 옛날의 위치를 되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지만 8·15광복 당시 한국 승단은 너무나 많은 난 문제들에 당면하고 있었다. 또 승단 자체가 이 대사업에 착수하기 위하여 아무 준비로 못했던 것이다.
27년 동안의 결산을 한다면 훌륭한 분들이 많은 공헌을 남겼다는 데 이견이 없겠지만 앞날이 완전히 밝아지기 전에 한국 불교는 아직 크나큰 과제를 해결해야 될 것 같다.
불교 정화 운동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나 핵심 문제는 불교의 통합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동시에 불교는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 이바지 하고자 하는 종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불교에서 내세우는 3대사업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만 이조의 배불 사상의 탓으로 피해 들어갔던 산을 이제 한국 불교는 떠날 때가 되었고 오늘의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사회인들과 함께 살고 사회 복지를 알선해 주는 불교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 종교는 물론 물질적 세계만을 생각해서는 안되며 육신의 문제만을 걱정하는 것이 될 수도 없겠지만…. 그러나 현대의 사회에 발을 맞추어 운영되지 않는 한 종교는 쇠퇴하게 마련이다. 종교는 인간 전체와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맡아 주는 것이 아닐까?
대승 불교는 본래 불타의 올바른 정신을 찾아 인간 세상에 뛰어들어 불쌍한 중생들을 살리는 보살의 사상을 가르치는 줄로 알고 있다. 약이 없는 자에게 약을 베풀어주고, 치료받지 못하는 이에게 의사가 되어 주며, 부모 없는 자식에게 부모가 되어 주고, 양식을 찾지 못하는 이에게 먹을 것을 알선해 줌은 바로 대승불교의 특징일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 한국의 현대 불교는 사회를 너무나 외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회 사업·자선 사업·교육 사업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불교의 승단은 사회가 기대하는 만큼하고 있을까?
얼마 전에 어떤 사찰을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만난 승려 한 분의 말을 들으니 『사회 사업이고 자선사업이며 육체적·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문제야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 우리는 정신적이며 고귀한 정리와 성불의 과제에 전념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말씀을 들으니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신 분들은 어떻게 이런 하찮은 일을 걱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성불도 자비행을 하면서 성취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잘못 생각해서 인지는 모르나 스스로 대승불교로 자처하는 이 불교는 소승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지? 스님들은 포교를 하고 수도하면서 모든 사람이 겪어 보는 노동의 고통도 겪어 보면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중소들을 더욱 완전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법화경에 나타나는 「장자 궁자」의 비유는 부처님의 완전 무결한 자비행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으니 오늘의 모든 불자들도 부처님처럼 오탁세에 뛰어들어 인류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기 바라는 우리 마음이 당연한 것이다.
오늘의 사회는 어느 시대의 사회보다 정토의 건설을 무의식 중에라도 갈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어느 때보다 진정한 보살 정신에 입각한 불교가 아쉽다. <신부·동국대 대학원 박사 과정> 【로제·르베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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