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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불교 전래 천6백년|불교가 한국에 끼친 영향|조명기 <전 동국대 총장·문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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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불교는 오랜 역사와 많은 민족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그 민족 문화의 바탕에 따라 불교의 양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자기의 문화로써 불교를 포착하고 융화하고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민족의 기질과 우리 문화의 역량이 불교를 가장 크고 넓게 개발하고 불교에 대해 새 가치관을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을 거쳐 신라통일시대의 불교도 가운데 특히 원효는 삼국 통일의 원리를 부여하여 한국 불교의 정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불교도는 문화적·사회적 기반을 부동의 태세에 오르게 하였고 이조의 불교도는 혼란과 곤절을 극복하면서 호국에의 집념으로 일관하였다.
이것이 불교로 하여금 역사적 사상을 창조하게 하고 민족적 자각에 등정하여 진리에 대한 탐구의 작업을 하게 했으며 윤리를 논의하고 자연을 애호하는 생활의 궤범을 세우게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이 시발부터 보급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치게 한 이는 특히 원효대사 (617∼686)이다. 대사는 삼장의 조예를 넓고 깊이 간직하여 복잡한 교리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통화의 사상을 완성하는데 성공하였다.
대사의 저서는 1백여종이나 있었으나 현존 한 것은 20종 가량이다. 이것은 모두 여러 학파를 융합하여 통일적인 불구를 성립시키려고 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귀일 운동의 과정으로서의 사물에 대한 통일적 사고의 파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효는 성전을 전면적으로 예리하게 관찰했다. 그의 『십문화쟁론』에서 말하기를 『여래가 재세 할 때 중생은 석가의 지시에 의해 이해하고 판단하여 별로 문제가 없었으나 이제는 공공의 논이 구름과 같이 솟아나 아는 정이라 하고 타는 사라고 하여 단순하고 쓸모 없는 이론만 횡행한 나머지 드디어 건너지 못하는 대하가 되고 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를들면 「유」와 「공」즉 긍정과 부정이라고 하는 대론적인 것의 존재 이유가 중추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유를 싫어하고 공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개개의 수목을 버리고 깊은 삼림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청과 남은 동체이고 빙과 수는 동원이지만 그러나 다른 것이라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인지. 원효는 인간 사회에 「화」와 「정」의 이면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화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고 기능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즉 적극적 또는 능력적으로 영구히 운동 전화하면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니 정도 화의 운동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에의 노력, 화에 정진하는 방편으로 보아 정도 가 관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즉 화를 통한다는 것은 화를 정진한다는 뜻이며 통화는 화의 정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종국에는 화도 정도 은몰되고 정진의행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만물이 소생하게 되고 이와 같은 원리로부터 사상이 나오고 예술이 나오고 정치·경제·문화가 나오고 세계가 %판 된다고 하는 것이 원효가 말하는 통화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만유의 생성은 만유 자신의 연동으로서 인식되는 것과 같이 화는 정에 관련되는 것이다. 이 관련성 그것이 중요한 접촉 관념 되는 것이다. 이때의 관련의 성격이란 것은 정적이 아니고 동적인 것이다. 그러고 거기에 운동 작용이 있어 그것이 한 세력이 되어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주의 본의라고 하는 것이 대사가 제창하는 사상의 진수이다.
그러면 원효대사의 우주관과 국가관의 연관성은 어떠한가. 대사의 통화된 우주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진실한 생활을 한다면 그의 현실은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실한 생활이야말로 인간의 영원한 것이니 불타도 이것을 구명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 체물과 정신도 우주의 진리 그대로가 통화되고 연동되어 있는 것을 감각할 때 자기 자신이 새로 나타나게 되어 우주와 일체화되고 살아 있는 자태를 알 수 있는 동시에 사회 전반의 정황으로부터 육성되어 가는 자기 자신을 감촉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우주 일절의 묘력에 통화되고 운동되어 있는 것을 각오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각성 의식에 의해 우리는 처음으로 감격과 환희를 체득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 실천론적 관점에서 이것을 구명하여 보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우주의 참 생명의 운동인 것이며 거기에는 완전한 일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개성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우주의 개성이 있다고 볼 것이며 자기가 활동하는 것은 우주가 활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이하여 그 근본에 있어서는 자기와 우주가 운동이 있을 뿐이란 것을 가르쳐 「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과 육체는 통화 외에 비로소 생활하는 것이 된다. 석가도 「견명성 개오도」한 뒤 정신적으로 비상한 호 변화가 있어서 기력이 용출 하여 이제까지의 석가와는 판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니 정신이 육체에 살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한 개의 신체는 우주로부터 고립 돼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활동력에 따라 체구도 움직이는 것이니 호흡이라든지 식물 등은 우주의 동력이며 혈맥·신경·사고·행위 등이 활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공기와 식물 등의 물질이 진심 한 것이라는게 아니고 호흡을 위한 대기도, 영양이 되는 식물도 모두 상호 관계를 가지고 운동한다는 통화의 양상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 생활상에서 보통으로 행위 하는 것이 그대로 수행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장소가 다 도장이다. 농부의 경작도 상인의 매매도 사사가 아니고 인생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최대한의 근로를 하여 거기에 나타나는 소소한 업무가 모두 우주의 진보에 기여하는 바가 된다.
이와 같이 풀이해 보면 원효대사는 굉장한 사상을 전개한 대종교가인 것을 알 수 있다. 대사의 목적은 당시 신라에서는 산만하고 파벌 있는 것을 융합, 통일함으로써 신라인 특유의 불교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한국의 지표에 침투되어 토착하게 됨에 천년사직의 호법이 되어 민족의 신조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토착 된 한국의 통화 사상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은 시련이 있었으나 현대에도 살고 있는 사상일 수밖에 없다.
산하는 바뀔 수가 있어도 통화의 진리가 영구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는 까닭은 이것이 사회 통일·민족 통일·문화 통일 등 모든 통일의 원체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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