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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제자 윤석오>|<제26화> 경무대 사계 (88)|김상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부란>
이부란-. 별로 쓰이지 않아 널리 알려지지 않은 「프란체스카」 부인의 한국식 이름이다.
이 이름은 6·25전에 작명 됐다. 「마담」은 서양식으로 이 박사의 성을 취해 「이 프란체스카」로 이름을 표기했는데 우리 글로 쓰니 너무 길다 해서 한국 이름을 지어 보자는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어느날 대통령이 공보 비서이던 김광섭씨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이 박사는 「마담」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지어야겠다는 얘기를 꺼냈다.
『예부터 이름 잘 짓는 사람이 있지.』
『예 작명가란 사람들이 있읍니다.』
『누가 이름을 잘 짓나.』
『보통 작명가에게 부탁 할 수는 없고 동양 화가로 고희동이란 분이 이름을 잘 짓는다고 합니다.』
이래서 고씨에게 「마담」의 작명이 부탁 됐다. 고씨는 「프란체스카」란 음을 살려 이부란이란 이름을 지어왔다.
이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다만 이 박사 재산으로 설립했던 대한 문화협 조사란 재단 법인의 이사장 명의로 등기된 일이 있을 뿐이다.
대한 문화협 조사 설립 사무는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임철호 비서가 맡았었다. 임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설립 경위는 대강 이렇다.
50년2월 임씨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이 박사는 자신의 재산에 관한 서류를 내놓으며 이 재산을 기금으로 우리 문화를 해외에 선전하는 단체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왜놈들이 오랫동안 우리 나라를 외국에 왜곡 선전했어. 그래서 외국에 알려진 우리 나라 풍습은 지게 진 사람이나 갓 쓰고 긴 담뱃대 물고 있는 미개한 모습 뿐이야. 도대체 좋은 문화 유산은 소개된 것이 없어. 우리 실업가 33명이 내게 집과 회관을 사줬어. 그러니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동포들의 것이야. 이 재산으로 해외에 문화를 소개하는 기금을 만들어 줘. 이름은 문화 선전사가 좋겠지.』
이 박사가 내놓은 재산 목록에는 이화장과 현재 신민당 당사가 된 이문당, 그리고 정릉의 별장이 들어 있었다. 이화장과 이문당은 이 박사 명의로 돼있으나 정릉 별장은 태창방직의 백낙승씨 이름으로 돼있었다. 이 별장은 백 사장이 이 박사에게 드렸으나 이 박사가 명의를 바꾸기가 꺼림직 하다고 그대로 둔 것이다.
지금은 재단 법인 설립 행위를 정관이라고 부르지만 그 당시 구 민법에서는 기부 행위라고 불렀다. 대통령으로부터 재단 설립 지시를 받은 임 비서는 기부 행위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몇 번 「브레이크」가 걸렸다. 첫 번에는 「마담」에게서 견제가 왔다. 이화장을 재단에 넣는데 반대라는 것이다.
『이 박사께서 항상 대통령을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언제고 민간인이 되어 나가 실게 아니겠어요 그때 사실 집이 있어야 해요. 이 박사께서 이화장을 받으신 것은 대통령 되시기 전이고 그분이 독립 운동을 하신 까닭이니 떳떳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화장만은 빼는게 좋겠어요. 내가 대통령께 말씀 드려도 듣지를 않으시는데 「미스터」 임 생각은 어때요.』
이런 「마담」의 의견을 조정하느라 한참 시간이 흘렀다.
두 번째는 이 박사 자신에게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백낙승씨 명의로 되어 있던 정릉 별장을 백씨와 상의했더니 백씨는 『제가 대통령께 이미 드린 것이니 대통령 뜻대로 하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래서 임 비서가 재단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대통령이 『그대로 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는 이유를 몰랐으나 6·25후 윤 황후가 인수재란 이름으로 이곳을 쓰게 된 뒤에야 임씨는 이 대통령의 깊은 생각을 알았다고 했다.
결국 이화장과 정릉 별장이 빠지고 이문당 건물만을 기금으로 재단 법인이 설립됐다. 재단의 명칭도 문화 선전이란 말이 너무 노골적이란 의견이 많아 대한 문화협 조사로 낙찰됐다.
대한 문화협 조사의 임원은 기부자인 이 박사의 지명으로 이 사장에 이부란, 이사에 신성모, 해위 (윤보선), 우양 (허정), 만송 (이기붕)이 취임하고 감사에는 이부란이란 이름을 지은 인연으로 고희동씨가 선임됐다.
재단 법인의 설립 절차는 6·25전에 끝났으나 재단 운영은 환도 후부터 시작했다.
활동이라고 해봐야 이문당 건물을 당시 세계 통신에 빌려줘 월세를 받아 적립하면서 해외에 문화 선전 활동을 하는 것이다.
선전 활동 자체는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이런 재단을 만들고도 행정부에 얘기 한마디 없었고, 다른 기부금도 받지 못하게 했다. 설립 당시에는 이사들이 모두 이 박사 추종자였으나 점차 정치적 색채가 달라져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모인 일조차 없었던 것 같다.
4·19후 이미 작고한 신성모, 만송 이외에 「마담」까지 이사에서 빠지고 오천석씨와 유진산 정헌주씨 등 민주당 인사 2명이 새 이사로 추가돼 문화협 조사의 이사진은 민주당 색채가 커졌다.
그러다가 5·16이후에는 실적이 없어서인지 법인이 해산되어 버렸다.
원래 기부 행위에는 법인이 해산되면 같거나 유사한 목적을 가진 법인에게 재산을 기부하도록 되어 있는데도 이문당은 국가에 귀속돼 현재 신민당이 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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