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실의 압력 이겨낸 지적 노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좋은 소설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즐거운 일이다. 그것은 우선 작가들이 현실의 압력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고 극복하려는 지적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데서 오며, 그 다음은 그 지적노력의 총화가 오히려 현실에 주게될 반응으로서의 압력을 상상할 수 있는 것에서 온다.
나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한 몇 개의 소설을 들면 이렇다. 이문구씨의 『관촌수필』(현대문학), 유재용씨의 『꼬리달린 사람』(동), 황석영씨의 『낙타 눈깔』(월간문학), 『한민년대기』(창작과 비평), 서기원씨의 『이인직전』(월간 중앙), 최인호씨의 『전람회의 그림2』(지성), 그리고 이병주씨의 『예낭풍물지』(세대)와 「월간중앙」에 연재되었던 씨의 『관부연락선』(신구문화사 간).
위의 여러 편의 소설들은 읽는 순간에도 나를 즐겁게 만들었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문학이 침체되어있다거나 할말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으면 위의 소설들을 한편이라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문구씨의 『관촌수필』은 씨의 이때까지의 작업에서 약간 비껴 서있는 작품이다. 씨는 그곳에서 억압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삶을 영위해 나가는 들을 인물 그리는 대신에 담담하게 자신의 집안을 그려내고 있다.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온다는 사건 속에 씨는 씨의 거의 모든 과거의 추억을 그에 끼어 넣어 그자신의 현재의 위치를 과거를 통해 재확인하려 하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쓰여져 있는 문장 역시 씨의 독특한 사설이 전혀 개입되어있지 아니한 정감적인 문장이다. 씨가 벌써 과거를 회상할 정도로 현실과의 접촉에서 그 탄력성을 잃어버렸는가 하는 질문이 씨의 문학 속에서 그것이 차지 할 수 있는 위치란 무엇일까와 함께 곧 제기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히 풀릴 문제는 아니다.
유재용씨의 『꼬리 달린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의사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한 의사의 입을 통해 서구화해 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토착 원주민들의 비인간화 경향을 극명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문명국이 되기 위해 한 인간의 삶을 여지없이 말살하여 버리는 그런 후진국에서의 삶의 비참함은 그런 짓을 자행하는 지배계층의 맹목성과 원초인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문명인의 환상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유씨는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신인인데 조해일씨와 함께 한국문학에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있는 신인으로 기대된다.
황석영씨가 왕성하게 2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낙타눈깔』은 월남에서 귀환한 병정들의 허무감 허탈감을, 『한씨 연대기』에서는 『25시』 비슷하게 상황에 의해 붕괴해 가는 한 지식인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
특히 『낙타눈깔』의 마지막 결구, 낙타눈깔로 표상 될 수 있는 허탈감에게 오히려 응시 당하는 주인공을 간결하게 몇 줄로 처리한 대목은 일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광용씨의 『꺼삐딴·리』와 거의 대척적인 인물로 그려진 『한씨 연대기』의 주인공의 직업의식이 비인간적인 상황과의 대립체로 뚜렷이 부각되지 못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의 결과와 결부되어 버린 것은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기원씨의 『이인직 전』은 씨의 오랜 탐구의 한 표현처럼 생각된다. 그 작품만을 읽으면 씨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상당 부분이 일실되기 쉽다. 씨가 그 소설에서 말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이인직의 교활한 현실감각이 아니라, 뚜렷한 역사의식 없는 행동이 보여주는 허장성세이기 때문이다.
그은 씨가 『마녹열전』 시작하면서부터 제시한 「테마」이며, 상황 자체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려한 사이비지식인들에 대한 씨 나름의 독특한 비판이다. 「제스처」나 허장성세로써 자신의 역사감각을 호소하려는 지식인들에 대한 씨의 비판이 호소력을 떠는 것은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제스처」와 허장성세로 무장된 자의 문체를 통해서이다. 그 문체야말로 그를 탁월한 의미에서 채만식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인호씨의 『전람회의 그림2』는 씨가 계속 실험해 오고있는 소설양식에 대한 충격을 재확인케 한다. 두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연결이 되어있는 그 소설은 씨의 소설공간을 가장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그러나 씨의 그 소설공간은 미숙한 「모더니스트」들의 소설실험과 무관하게 삶과 상황에 대한 탐구열과 거기에서 생기는 아픔으로 가득 차 있어, 그 실험이 모방이 아니라 그 소설양태자체가 씨의 고뇌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지케 한다.
이제하씨의 분노의 외침과 함께 최씨의 저 절제된 아픔이 주는 문학사적 의미는 표현이 내용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표현이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시킨 데서 얻어진다. 이병주씨는 나에게 퍽 저항감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씨의 현학취미와 낭만주의는 씨의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나를 거북스럽게 만든 것인데, 그것을 나는 『예낭풍물지』에서도 어느 정도 느꼈다.
거기에서도 씨의 요설과 낭만주의적 경향이 몇 개의 「아포리즘」을 축으로 꿰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씨의 『관부연락선』을 읽고 그 이전의 그 작가에 대한 거북살스러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좋은 작품이 주는 충격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였다. 물론 그 작품에도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주인공의 서구라파 유학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것을 뛰어넘어 그 소설에는 격동기의 한국사회를 정직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커다란 노력이 있다.
최인훈씨의 『광장』의 주인공과 같은 위치에 서있지만, 그 소설의 주인공은 그러나 이명준처럼 체험을 통해 회색인이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고의 결과로서 스스로 회색인이 된다. 그 회색인은 최인훈씨의 주인공 역시 그러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회색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자기 나름으로 개조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주목할만한 장편이라고 생각한다. 【김현<문학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