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계획과 친족상속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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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번에 보사부가 마련한 가족계획추진방안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고 타당한 조치로 생각된다. 그 골자는 ①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모자 보건법 제정 ②여성지위향상을 위한 친족상속법 개정 ③교육을 통한 가족계획 계몽 ④인구문제심의위원회 설치 등으로 보도되어 있다. 그 가운데 ③④의 경우는 전혀 이론이 있을 수 없겠고, ①과 ②의 경우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먼저 임신중절의 허용에 대해서는 이로 인해 빚어질 인명경시와 성도덕의 문란 등을 염려하는 반대의견이 계속되어왔다. 그러나 음성적으로 성행되어온 임신중기의 실태를 알아본다면 그와 같은 반대 이유가 공허한 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의사도 본인도 법률도 남용 자행되는 임신중절을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음성적으로 자행되어 모자의 건강을 해치는 등 숱한 부작용까지 일으키는 임신중절을 차라리 법이 허용함으로써 양성적으로 유출시켜 현실을 합리화시키는 제도가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물론 엄격한 심사제도와 규제조항으로, 꼭 임신중절 해야 할 사람은 떳떳하게 할 수 있게 하고, 해선 안될 사람은 못하게 통제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음성적으로 성행하는 임신중절에서 빚어지는 성도덕의 문란이나 폐단은 차라리 양성화해서 수습하는 편이 낫고, 현재 숨어서 자행되고 있는 태아살인행위는 법으로 구제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다음으로 친족상속법을 개정,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킴으로써 아들에 대한 집착을 완화시켜 보자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사실 친족상속법의 개정은 인구문제와는 상관없이 인도적 견지에서 벌써 개정되었어야할 문제로서 만시지탄의 감이 적지 않다. 1950년대에 신민법을 제정하려 할 때 뜻 있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민주헌법의 이념에 맞추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거니와 당시 대부분의 입법자들이 법 체제상의 문제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을 뿐, 남녀평등을 구현해야한다는 철저한 민주의식을 갖지 못했다.
당시 어떤 선량들은 본래 친족상속법이 민족의 관습에 근거를 둔 이상 남녀평등은 시기상조이며 많은 여성이 감수하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의 지위를 더 이상 향상시키려는 것은 무모하다는 공격까지 서슴지 않았었다. 만일 그때 이미 사회제도적으로 남녀평등을 확실히 보장해놓았더라면 오늘 이토록 엉뚱한 인구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서두르는 우스꽝스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 나라 인구정책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이 10년은 앞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을 원망하는 한탄의 소리를 계속할 때는 아닌 줄 안다. 이제라도 동기와 이유는 다르지만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친족상속법을 고치겠다는 것을 우리는 크게 환영하며 이의 입법화를 위해 노력해 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현행 친족상속법에는 친족관계·자녀문제·부부재산문제·상속문제·호주제도 등에서 너무도 명백한 남녀차별조항이 많이 들어있다.
사회 통념이나 인습이 아직도 남존여비의 봉건적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도 문제인데, 법률마저 어머니 보다 아버지를 우대하고 딸보다 아들을 소중히 하고, 아내보다 남편을 존중하고 있다면 아들을 낳을 때까지 한사코 출산을 계속하려는 부모의 심정을 탓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가족계획 인구 조절은 여성의 지위향상 없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민주주의의 발전이 더딘 사회일수록 제도의 우선으로 현실을 개선하는 방법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에서 이번 보사부의 가족계획안을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가족계획의 본질은 임신중절이 아니라 임신의 조절이며 4천년 묵은 남자존중주의의 낡은 의식구조를 세뇌시키는데 있다는 점을 깨닫고, 그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태영<가정법률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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