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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암행일기(1)<제자는 『서해 암행일기』의 표지>-숙종 때 암행어사 박만정의 행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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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숙종 22년(병자1696) 3월6일 비가 오다. 땅거미가 질 무렵, 정원에서 전갈이 왔다. 임금께서 정원에 전교 하시기를 앞서 보덕 벼슬을 지낸 박모(만정)와 군자정 이의창 및 이조정랑 이정겸 등을 내일 아침에 불러들이도록 이르시었다는 것이다.

<종5품의 벼슬 주고>
3월7일 맑다. 이른 새벽에 승정원 하인이 다시 명패를 갖고 내달아온다. 그 패문을 받들고 즉시 대궐로 나아가다. 이의창·이정겸 등과 한 자리에 앉아있으니 도승지 정중휘가 아무개 등이 예궐하여 기다리고 있다고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께서는 곧 상피단자를 써서 붙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때 아무런 직함도 없었는데 즉석에서 병조에 명하여 나에게 군직을 주도록 하니 구두로 부사직(종5품)이란 벼슬에 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3년째 은거 중이었다.) 잠시 후에 중사가 봉서 3봉을 가지고 정원으로부터 나왔다. 모든 승지들이 열좌한 가운데 우리 세 사람에게 그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는데 봉면에 모두 직함과 성명을 쓰고 계자가 눌려있었다. 내가 받은 봉서에는 군직이 쓰여있지 않고 전보덕 박만정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지체할까 감시까지>
이때 사알(액정서에 소속되어 임금의 말씀을 전달하는 잡직)이 임금께서 내리시는 등 약5종을 갖다주었다. 호조에서는 정목4필, 백미·두 각각 5말, 민어 3마리, 조기 3두룸을 노질로 보내왔는데 이것은 전례에 준하여 지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호조판서 이세화가 별도로 돈 닷냥을 보내왔다.
드디어 나는 이의창·이정겸 등과 동대문 밖 관왕계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봉서를 뜯어보았다. (이 봉서는 성문 밖 지정장소에서 개봉토록 돼있다.) 거기에 행선지가 적혀있는데 나는 황해도요, 이의창은 함경도이고 이정겸은 충청도였다.
이곳에서 잠시 행장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가 혹시 지체할까싶어 액정서의 하인이 살피러 다가오는지라 즉시 우리는 흩어져 제 갈길을 떠났다. 영도교를 지나 남산바깥 벌아치의 송림에서 쉬며 아우를 만나 잠시 얘기하고 헤어졌다.
내가 받은 마패는 2개이다. 하나는 삼 마패로 이것은 내가 갖고, 다른 하나는 단 마패로 서리가 갖도록 하였다. 수행 하인으로는 홍문관 서리 김성익과 청파역의 선망·팔명·갑용과 왕십리 역의 선종 및 내 집 종 계봉이었다.
짐 실을 말과 양식 등이 오기를 기다려 날이 저문 뒤에 길을 떠났다. 짐을 실은 역마가 늙고 야위어서 걸음이 몹시 무딘 까닭에 연서역에 당도하자 좀 나은 말로 바꾸어 길을 재촉했다. 사현을 넘으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창릉 다리를 건넜지만 길을 분별할 수 없어 여석치의 촌가로 들어갔는데 그집 사람들이 어찌나 몹시 방새하는지 가까스로 잠자리를 빌어 저녁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때 이미 이경이 지났다.

<서리와 평교로 대해>
내가 감기 때문에 얼마나 기침을 자주 했든지 아랫목의 주인노파가 『웬 행객이 우리 ??벽을 저리 더럽히는가』(더러운 객이란 뜻)고 심한 말을 퍼부었다. 나는 대꾸도 않고 자버렸다. 깨어보니 벌써 새벽닭이 울고 있었다. 나는 서리를 깨워 부르기를 김봉사라고 하여 평교처럼 대하는 체 하였다. 일행은 여장을 수습해 길을 재촉했다.
3월8일 맑다. 새벽에 길을 떠나 고양군을 거쳐 벽제 주막에서 조반을 드는데 거지들이 몰려와 울타리 너머로 밥을 얻자고 애원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이 동정을 비는 몰골이란 보기에 매우 처참했다. 낮에 파주읍내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은밀히 사람을 관아에 보냈더니 문지기에게 밀려나 들어가기조차 못했다.

<사돈에 행자 얻기도>
이때 이식이 목사로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해서지방의 물정에 밝았고 또 양식을 얻어 보태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글러 버렸고 또 내 행색이 알려지는 것을 저어하여 당초 계획을 중지키로 했다. 느지막이 장단에 도착했다. 사돈인 남필성이 부사로 있는 곳이다. 그에게 쪽지를 적어보내어 슬며시 만날 것을 기별한 뒤 잠시 있다가 어두워지자 관아로 들어갔다.
사위인 남서하는 그의 형 남상하 집에 아들을 맡겨두고 있었는데 며칠 전 요절해 선산에 매장했었다. 사위와 그의 형도 이때 관아 안에 모였었다.
함경도로 가는 군자정 이의창은 곧 남필성의 생질이다. 그도 양식을 가져갈 양으로 역시 뒤미쳐 들어섰다.
사돈 남공은 폭넓고 그림 많은 천익과 담배며 연죽 등 행자를 넉넉히 주었다.
3월9일 맑다. 새벽에 길을 떠나 ???교를 건너 송도 남문 밖에 다다랐다. 여염집과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피해 외진 곳에 들어가 조반을 하고 길을 떠났다.
여기에서 서리와 헤어져 서로 길을 따로 하기로 하고 양식과 반찬거리를 나누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청석동을 빠져나와 파발주막에 도착하였는데 별안간 두통·악심증이 일어났다.

<두통에 평위산 한첩>
그래도 꾹 참고 김천 답곡촌까지 왔는데 통증이 심해져 하는 수 없이 촌사로 들어갔다.
자루에서 평위산 한 첩을 꺼내 달여 먹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밤이 깊어서야 흰죽 약간으로 허기를 메우고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내 수령들의 이런저런 일들을 자세히 물어 들은바 많았다. <이봉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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