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풀어도 물가 하락 … 미 양적완화 축소 '엉킨 퍼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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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중앙은행가들이 양적완화(QE) 축소 를 깊이 논의한 사실이 20일(현지시간) 드러났다. 10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록 공개를 통해서다. 회의록 공개는 ‘달러 신전(神殿)’인 미 중앙은행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다. 회의록에 따르면 FOMC 멤버들은 “몇 차례 더 회의를 한 뒤 자산 매입(양적완화)을 줄일 필요가 있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글로벌 시장은 이를 “조만간 또는 머지 않은 장래에 QE가 축소될 수 있다”고 해석했다. 또다시 QE 축소시점을 놓고 예측게임이 시작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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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날 심상찮은 일이 하나 일어났다. 10월 미국 소비자물가가 한 달 전과 견줘 0.1% 떨어진 사실이 공개됐다. 물가가 떨어지기는 올 4월 이후 반년 만에 처음이다. 그 결과 올 1~10월 물가상승률은 1% 정도로 낮아졌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가장 낮다. 미국 휘발유 등 에너지 값이 떨어져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식료품과 에너지 등 변동성이 강한 품목을 제외한 근원소비자물가지수(Core CPI)도 10월 1.7% 상승에 그쳤다. 중앙은행 관리 목표인 2%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해 4월 이후 이 지수 상승률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물가 하락 조짐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기준 금리를 0.5%에서 0.25%로 낮췄다. “낮은 물가상승률이 오래 이어지고 있어서”라고 인하 배경을 설명했다. 더욱이 21일 블룸버그통신은 “ECB가 물가 하락 압력 때문에 미국식 QE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은 사실상 비상상태다. 아베노믹스에도 디플레이션이 계속될 조짐이어서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은 “전문가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 보니 일본은행(BOJ)이 2015년 4월까지 물가 2% 상승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게 다수였다”고 전했다.

 사실 물가 하락 조짐은 수수께끼 같은 현상이다. 미국과 일본이 매달 850억 달러(약 91조원), 14조 엔(약 147조원)씩 돈을 찍어내고 있는데도 물가가 그 모양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열기구가 땅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열심히 불(QE)을 지폈는데도 열기구(물가)가 상승력을 잃고 있다는 의미다.

 불똥은 자산시장으로 튀었다. 미 국채 가운데 금리가 인플레이션과 연계된 채권 값이 올 들어 급락했다. 올 1월 1일~11월 20일 사이 수익률이 마이너스 7% 정도다. 채권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다.

 물가 하락 조짐은 실물경제에도 달갑지 않다. 디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퍼지면 소비가 준다.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그랬다. 또 다른 후유증도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중앙은행의 침체 대응력이 약해진다”고 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버냉키는 실업률 등 노동시장 지표를 기준으로 QE를 축소할 예정(버냉키 준칙)이다. “일자리가 꾸준히 늘어 실업률이 7% 이하로 떨어지면 자산 매입(QE)을 줄여나갈 수 있다”는 식이다. 이 준칙(룰)은 물가가 정상적으로 오르는 것을 전제로 정해진 방식이다. 그런데 요즘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그 바람에 Fed 내부 논란이 커지고 있다. 최근 윌리엄 더들리 뉴욕준비은행 총재 등 비둘기파들은 새로운 변수인 물가를 QE 축소 방정식에 넣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제러미 스타인 Fed 이사 등 매파들은 “실업률이 떨어질 때마다 자산 매입 규모를 일정 규모씩 줄여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버냉키 룰대로 가자는 얘기다.

 버냉키는 내년 1월 말 퇴임한다. 말년 병장에게 새 퍼즐 맞추기란 임무가 주어진 셈이다. 성장과 실업률 말고도 새 변수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QE 축소 결정이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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