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제26화 경무대 사계(7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외교스타일>
한·일 회담은 「구보다」(구보전)망언으로 파동을 겪게되지만, 그 경위에 관한 설명을 잠시 뒤로 밀고 이대통령의 외교자세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외교를 가장 중요시해서 주요외교시책은 사실상 경무대서 전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박사의 이런 생각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였던 것 같다.
이 박사는 미국망명시절에도 고국청년들을 만나면 『한국의 독립은 외교에 있다』고 역설했고 망명객으로서 폭넓은 외교활동을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는 『건국 초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는 외교를 으뜸으로 해야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떻든 이 박사의 외교수단은 탁월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이 박사는 대미·대일외교를 아주 중요시했고 두 공관의 대사임명은 아주 신중히 손수 처리했다.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이박사의 외교방식은 구미식 외교에 우리 나라 형편을 고려한 그 나름의 독특한 방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그는 우리 나라가 외교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줄 것은 없고 받아내야 한다는 사정을 언제나 머릿속에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날을 내다보고 상대편의 속셈을 통찰해서 항상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때로는 고압적인 태도로 임하려고 애썼다.
대미외교에서 이런 이 박사의 자세가 뚜렷이 부각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미국을 한국에 묶어 두기 위해 미국을 난처한 지경에 몰아 넣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한·미 방위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휴전협정을 반대하고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단행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랄 수도 있겠다.
그는 한국에 와 있는 미국 관리들에 대해 필요하면 언제든지 철저한 냉대로 그를 견제하면서 다른 「채널」을 통해 대화를 했고 할 말은 다 했다.
군정 하에서 「하지」와는 반목했지만, 「맥아더」와는 대화를 계속했고 전시 중엔 「무초」대사를 골탕먹이면서 군부를 쓰다듬은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이 박사는 6·25후 「덜레스」미 국무장관과 그렇게 친했으면서도 「델레스」가 일본편만 들고 우리의 정당한 주장은 외면한다고 마구 비난을 하기도 했다.
한·일 회담이 청구권문제 등으로 난항을 걷고 있을 때로 기억되는데 미국무성이 『일본은 한국에 대해 당연히 지불할 것은 지불해야 하고, 한국은 일본이 한국발전에 기여한 대가를 인정해야 한다』는 문서를 만든 적이 있었다.
이때 이 박사는 화가 얼마나 났는지 『「덜레스」와 「딘」(변호사·당시 미국무성고문) 이 왜놈 편만 들고 우리의 정당한 주장은 안 들어…』하면서 마구 비난을 했고, 그것이 외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박사의 대일외교는 처음엔 『내가 살아있을 때 일본이 과거 여러 가지 혹독한 짓을 한 경계할 민족임을 널리 알리는데 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내 재임 중엔 해결의 토대만 닦아놓고 후계자가 이를 물려받아 처리하는게 좋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이박사의 대일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 나라와 일본은 국력이나 외교능력 면에서도 차이가 나고 또 과거의 전례로 보아 경계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박사는 한·일 회담 과정에서 일본측이 성의가 없다고 일본을 자주 비난했었는데 「기시」(안)의 본심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58년 초로 기억되는데 「기시」일본수상은 『초심불가망』이라고 붓글씨를 써서 이박사에게 보낸 적이 있다. 자기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며, 약속한 것은 그대로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이박사도 「기시」수상을 믿게 됐고, 한·일 회담은 상당한 진척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저지른 죄과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58년 한·일 회담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으로 생각되는데 이 박사는 『한국에서 군인·경찰을 했거나 한국인착취에 두드러지게 동조한 일본인은 국교정상화 후 30년간은 한국에 입국할 수 없다』는 조문을 기본조약에 넣으라고 했었다.
여하간 이 박사는 국가이익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외교의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이 박사는 극비에 속하는 외교문제가 있을 때는 외무부를 제쳐놓고 현지 담당자와 직접 연락을 취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자주 현지 공관에 나가있는 대사나 책임자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외교문서는 자신이 직접 「타이핑」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담」이 작성토록 했다. <계속> [제자는 필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