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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할퀸 땅 … 아이티 지진보다 참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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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이티 지진 때보다 상황이 훨씬 나빴습니다. 그런데도 현장의 의료봉사 활동은 아이티 때보다, 중국 쓰촨 대지진 때보다 적어 안타까웠어요.”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를 휩쓴 사흘 뒤인 지난 11일 우리 정부 구호단으로 현지에 급파됐던 국립중앙의료원 외상외과 전문의 박종민(40·사진)씨 얘기다. 2010년 1월 아이티 지진 참사 때도 1주일 간 의료봉사를 다녀온 박씨는 “아이티에는 그래도 물·전기 등을 공급하는 기본 시설이 남아 있었지만, 필리핀 피해 현장에선 3박4일 머무는 동안 물·음식·전기가 전혀 공급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 세계의 대형 재난 현장을 많이 다닌 한 구호단원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박씨는 외교관 2명·중앙 119구급대원 2명·KOICA(한국국제협력단) 직원 2명 등 6명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타고 한국인으론 처음 피해 현장을 찾았다. 미군이 관리해온 활주로는 상태가 괜찮았다. 하지만 공항 주변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고, 타클로반 공항 관제탑 두꺼운 강화 요리도 모두 파괴돼 있었다.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저지대의 판자촌은 대부분 물에 쓸려가고 없었다. 거적에 덮인 시신들이 즐비했다. 한 주민은 박씨에게 ‘건물 2층 높이의 쓰나미 같은 파도가 2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해 주민 대부분이 대피할 틈도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외상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박씨는 “위생 상태가 나빠 감염병이 발생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고 말했다. 박씨는 한국에서 파견될 의료진 본진이 의료 활동을 펼칠 이동식 병원 부지를 물색해야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동식 병원 설치에 적당한 공원·학교 등에 이미 이재민들로 꽉 차있었기 때문이다. 중앙의료원은 아이티 지진 때 이동식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한 뒤 2년 동안 이동식 병원 가동을 준비해왔다. 제주도에서 설치 연습도 했다. 이동식 병원을 세우려면 3t이 넘는 텐트(1동당 300㎏ 이상) 외에 수술 장비·발전기(8대)·에어컨 등을 운송해야 하고 넓은 땅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다. “필리핀에서의 이동식 병원 설치는 포기했다”고 그는 밝혔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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