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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욱 형을 조 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 형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전화로 받고 수화기를 쥔 채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월 여전 고려병원에 재 입원했을 때 뵌 뒤 댁에 나와 차도가 있다고 전문하였으므로 다소 마음을 놓았었고 수일 전에는 어느 문단의 회합에서 식사도 한다는 말을 듣고 얼른 회복하기만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는 까닭 없이 형의 생각이 나서 댁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부인의 힘없는 통화였습니다.
퇴원 후 다시 뵙지 못한 게 우선 한스럽습니다.
최 형! 형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점이 많은 중에서도 먼저 형은 툭 트인 사람이라는 것이 이 순간 단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입니다. 활달하다거나 소탈하다는 말로 바꿔 놓을 수도 있는 툭 트인 성격은 또 청탁을 함께 마시는 내면의 넓이와 아량을 뜻하는 것인데 그것은 형의 불교의 신념으로 몸에 밴 대승적 무 애의 경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형은 문필이 본업이면서 무대에 서면 연기자 못지 않았고, 강단에서는 열이 넘치는 명 강의도 해치웠습니다. 『개나리』같은 아름답고 아담한 단편을 쓸 수도 있었으나 『임걱정』 같은 의 협의 인물을 삼림 같은 구성 속에 구수하게 다룰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형이 무엇보다 섬세한 작가이고 한문의 소양이 깊은데서 스스로 이룩된 것이라고 믿지마는 형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그 묵향이 빚어내는 구수함이 점점 열려지는 듯, 그래 또한 슬픈 일 입니다.
최 형! 형은 무 애의 활달한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 의의 인이었습니다. 『임걱정』외에도『초 적』등으로 불의에 항거하는 작품을 연 면하게 썼습니다마는 형의 자연인으로서의 항복이 그랬었다는 것을 나는 더 높이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니꼬운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분이요, 또 의리의 인이었고 정의 인이었습니다.
형은 오직 글만 썼습니다. 쉬지 않고 썼던 것입니다.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형에게 빚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형은 1920년 생. 그러니까 향년53세. 작가로서는 이제부터의 나입니다. 형을 적당히 쉬어가면서 쓰게 할 수는 없었던가요? 형을 죽게 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 것 같습니다. 좋은 세상에 환생하시기 빌 뿐입니다.

<고 최인욱 씨의 장례식은 16일 상오10시 서울 영등포구 상도1동117의16 자택에서 거행되며 장지는 모란공원묘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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