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제26화>경무대 사계|황규면(필자는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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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건」의 연속>
배설물을 거름으로 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결심은 단호했다.
그렇지만 몇 천년 내려온 습관이 하루아침에 대통령 지시가 떨어졌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상당히 오랫동안 직접 단속하려 부산의 교외를 두루 살폈다.
어느 날 아침 이 박사는 부산시장과 고재봉 비서를 데리고 감천방면으로 단속 차 나간 일이 있다. 가는 길에 송도에서 「시멘트」로 만든 분뇨 「탱크」 가 방치된 것을 발견했다.
그곳 농부들이 채소밭의 거름으로 쓰기 위해 저장해 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즉시 차를 멈추도록 했다. 당장 분뇨 「탱크」를 덮으라는 호령이 내렸다. 부산시장과 경호경관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민들을 불러 분뇨 「탱크」를 덮느라 분주했다.
대노한 대통령은 꼼짝도 않고 서서 덮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몇몇 농부가 고 비서에게 『저희가 곧 덮을 테니 대통령을 모시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좋겠다고 생각한 고비서는 대통령께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고씨를 밀치며 『내가 덮는 것을 확인해야해. 자네도 가서 좀 거들어』하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고 한다.
오산 선에서 전열을 경비한 「유엔」군이 총공세를 시작해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3월14일 서울이 재탈환됐다. 차차 위기감은 사라졌다.
이를 전후해서 국민방위군 부정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정치문제 화하여 정국은 시끄러웠다.
국민방위군사건은 방위군 간부들이 25억 동에 달하는 방위군예산을 착복해 제2국 민병으로 소집된 장정 수 천명이 아사하거나 병사한 큰 부정사건이다.
거창 사건은 51년2월10일 공비출몰지구인 거창군 신원면 일대 주민 5백 여명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협의로 11사단9연대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장병에 의해 무차별 살해된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정치문제화 하여 이해 3윌29일 국회에서 각기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됐다.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특조위는 4월25일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50년12월17일부터 51년3월30일까지 1백5일 동안에 연인원 7백58만2천9백40명의 유령병력23억5천 만원의 현금과 식량20억 여 원 도합53억 여 원을 착복했다. 그러나 병사자와 아사자가 속출한 현실을 감안할 때 부정 액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제2 국민 병이 당한 참혹한 천대는 50만 장정으로 하여금 한국을 배반하도록 유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같은 과오를 범한 책임자는 할복자살을 해도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며 국민 앞에 사과하여 민족정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표명해야한다』는 것이 중간보고서의 요지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방위군사령관 김윤근은 부당하다는 투의 담화를 냈고, 신성모 국방장관도 방위군축을 두둔했다.
당시 신 장관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임은 대단했다. 민국당, 공화 구락부 등 야당의원들이 신 장관의 파면을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구했으나 대통령은 『강을 건너다가 말을 바꿔 탈수는 없어』라고 일축했다.
신 장관은 국방책임자로서 실정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가 경륜이 없고 역사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성실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대통령도 그의 이런 면을 좋아했던 것이다. 게다가 신 장관은 이 박사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전쟁 전부터 신 장관은 거의 매일 비서들이 출근하기 훨씬 전에 경무대에 들어와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 박사 즉 대한민국』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자연히 대통령비위도 잘 맞추었다. 신 장관의 장기 중 하나는 읍소 작전이다.
이 박사는 눈물에 약한 분이라 때를 잘 맞추어 눈물을 흘리는 신 장관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통령의 비호를 받는 신 장관도 방위군사건에다 거창 사건이 동시에 터져 나오니 그 자리를 부지하기 어려웠다.
거창 사건은 현지경찰에서 내무부에 사건개요를 보고함에 따라 표면화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유석(조병옥)은 신 국방장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군인의 양민학살사건을 보고 받은 유석은 장면국무총리에게 우선 이 사실을 알리고 같이 대통령에게 현지조사를 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신 장관은 현지조사를 한 뒤 그런 사실이 없다는 복명서를 대통령께 제출했다. 이렇게되니 자연히 내무·국방장관간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이 심해졌다. 당시 법무부장관이던 낭산(김준연)은 같은 한민당 출신 장관인 유석의 편에 서서 신 장관을 공격했다.
한편 국회 특조위는 4월3일 사건현장조사를 가던 중에 괴뢰군 복장을 한 국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 피습사건은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꾸몄다.
현장조사는 금지됐지만 거창 사건에 겹쳐 국회조사단 피습사건이란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사가 지연되고있는 동안에 거창 사건은 신 장관 반대파의 발설로 외국통신에 크게 보도됐다. 이로 인해 이 박사는 대노했다. 이런 분위기를 몰랐는지 운석(장면)과 유석은 현지조사를 재차 대통령께 건의했다. 『당신 네 들이 신 장관을 좇아 내려 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게야.』이 박사는 응접실 문을 벌컥 열고 집무실로 가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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