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약탈 미술상의 아들 "왜 내 그림 뺏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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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왜 사람들이 내 개인 소유물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모르겠다. (성경의 10계명에)‘도둑질하지 말라’고 써 있지 않나.”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 1400여 점을 보관해 온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81)가 처음으로 언론에 입을 열였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 인터넷판(사진)은 17일(현지시간) 수십 년간 명작에 둘러싸여 유령처럼 지내온 구를리트의 생활을 전했다. 그는 나치와 협력해 의심스러운 거래를 해 온 것으로 알려진 미술상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아들이다. 1956년 아버지사후 물려받은 작품들을 모두 뮌헨의 한 아파트에 보관해 왔다. 그러다 지난해 2월 사법 당국이 미술품을 압수했고, 이 사실이 최근 공개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보관해 온 작품 중엔 마르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등 거장들의 미공개 작품이 포함돼 있으며 가치는 10억 유로(약 1조4300억원)에 달한다.

 구를리트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해 왔다. 63년 이후 TV를 시청하지 않았으며 인터넷은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슈피겔 기자는 구를리트가 호텔 예약을 위해 타자기로 쓴 편지를 수개월 전에 호텔로 보내는 등 “마치 다른 시대 사람 같다”고 전했다. 지난해 여동생이 암으로 죽으면서 남은 가족은 없고, 친구는 애초에 없었다.

 인터뷰 중 구를리트는 프란츠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를 인용하며 검찰을 비난했다. 그림을 압수해 간 과정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사람을 고문한 후 죽이는 행태와 유사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또 “작품의 출처에 대해선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비밀로 묻어두어야 할 연애담처럼 혼자 간직하겠다”며 “내 평생의 사랑은 그 작품들뿐”이라고 했다. 인간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를 묻자 “한 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치 미술상’으로 불리는 아버지에 대해선 “나치와 협력했지만 이는 오직 그림들을 불태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항변했다.

 구를리트가 미술품들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소유권 공방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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