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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살 뻗친 「매그로·힐」 출판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세계 굴지의 출판사인 미국 「매그로·힐」에 금년에 망신살이 뻗친 모양이다. 「클리퍼드·어빙」이라는 지식 사기꾼이 쓴 「하워드·휴즈」 자서전을 75만 달러로 계약한 것이 발행 직전에 가짜로 드러나 세계적인 화제가 된 것은 이미 구문에 속한다.
어처구니없는 이 사건으로 「매그로·힐」의 위신과 신용은 크게 멍들고 출판부 일부 책임자들의 인책논까지 대두되었다. 최근 어빙 부부가 사기죄로 기소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 지어지는 셈이지만 워낙 미국 동부 지식인들이 깊이 관련된 사건이라 지금도 여전히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판국에 충격적인 사건으로 등장한게 「레드·폭스」 추장 회고록의 표절 사건이다. 「레드·폭스」는 금년 1백세가 넘은 인디언 영감인데 인디언 가운데 수 (sioux)족의 추장이었다고 자칭하면서 「캐스·애셔」라는 3류 문객의 손을 빌어 작년에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은 「매그로·힐」사가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레드·폭스」 영감은 10만부 이상 팔린 회고록의 인세로 돈을 얻었을 뿐 아니라 매스컴의 물결을 타고 일약 유명 인사가 되어버렸다.
그 책은 여전히 「베스트·셀러」의 하나다.
그러나 책이 한참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던 작년 12월 시카고 법원은 「매그로·힐」을 상대로 한 민사 소송 한 건을 접수했다. 소송 내용은 「레드·폭스」 회고록은 1940년 「제임즈·매그레고」가 쓴 「운디드·니 학살」이라는 책의 표절이라는 것이고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매그레고의 딸 「잔·헴스트러」였다. 매그레고의 「운디드·니 학살」은 인디언 투쟁사의 고전적인 책이다.
모두 4만 단어로 된 「레드·폭스」 회고록 가운데 무려 1만2천 단어가 매그레고의 책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 드러났다.
결국 여기서도 「매그로·힐」은 휴즈 자서전 때처럼 진실성의 규명이나 고증을 게을리 한 것이 폭로되었다. 그러나 「매그로·힐」은 소송 사건에 진지하게 응하지 않고 있다가 휴즈 자서전 사건을 만났다.
이 사건이 터지자 「뉴요크·타임스」의 「헨리·레이먼드」 기자가 「레드·폭스」 회고록 사건을 파고들었다. 그는 「레드·폭스」와 회고록 집필자인 애셔는 물론, 인디언 관계 전문가들을 만나본 결과 「레드·폭스」 영감은 추장에 뽑힌 일이 없고 그의 인디언 가문이 수족의 명문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것을 3월10일자 「뉴요크·타임스」 1면과 22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뉴요크 시내 「타임스·스퀘어」에 출판 왕국을 세우고 있는 「매그로·힐」의 위신은 치명적인 원·투·펀치를 얻어맞고 표절을 시인했다. 그래서 「매그로·힐」은 「잔·헴스트러」에게 액수 미상의 손해 배상을 하고 앞으로 팔리는 책의 인세 일부도 지불키로 전격적인 합의를 보았다.
뒤늦게나마 인디언 사의 고전을 쓴 매그레고의 권익은 보호되고 「레드·폭스」 영감과 애셔의 지식 사기 행각은 덜미가 잡혔지만 대출판사의 권위와 선전만 믿고 7달러짜리 회고록을 산 10만 독자들의 피해를 보상하는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넘어갔다. 소비 대상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는 지식 시장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워싱턴=김영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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