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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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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산군의 중립지대 침범으로 6일간 중단됐던 휴전회담은 8월10일에 다시 열렸지만 남일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날 공산대표들은 그들 회담전술의 장기인 「장광설」에다 「침묵」이란 새 전법을 가미하였다.
「조이」제독은 재개된 10일 회의에서 군사분계선에 대한 종래의 「유엔」군측 입장을 재차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 다음은 남일이 발언할 차례인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앉아있었다.
이렇게 해서 무려 2시간11분 동안 양측대표는 이때까지의 「입씨름」대신 「눈(안)씨름」으로 맞섰다. 이 동안에 이상조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미국에 대한 욕설, 즉 『제국주의자들 심부름꾼은 상가집 개보다도 못하다』고 종이에 써서 남일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그 낙서는 큰 글씨로 썼기 때문에 맞은 편에 앉은 「유엔」군 대표들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참다못해 「조이」제독이 다시 입을 열고 회담교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의제 제2항목은 그대로 덮어두고 제3항목 토의에 들어가자고 제의했지만 남일은 한마디로 「안 된다」고 거부했다.

<장광설에다 「침묵전술」까지>
여하튼 이래서 2시간 너머의 침묵은 깨진 셈이었다. 이날부터 공산측은 회의전술로 장광설과 침묵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여 군사분계선 논쟁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때의 울분과 일종의 체념을 「조이」제독은 그의 한국휴전회담 회고저서인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수법』(How Communists Negotiate)에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군사분계선과 비무장 지대 설치를 둘러 싼 쌍방의 논쟁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채 매일 계속되었다. 문산 사과밭에서의 우리 생활도 이제는 익숙해져 둘레의 전원풍경에도 무감각하게 되었다. 처음에 여기 올 때에 온 몸을 사로잡았던 흥분과 기대와 두려움도 어디론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베이스·캠프」생활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무섭게 달려드는 파리 떼였다. 겨울이 오지 않는 한, 파리 떼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됐다. 이 회담도 겨울이 되면, 어떤 결말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빨리 추위가 왔으면 하고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쌍방이 준비한 논쟁의 자료도 이제는 바닥이 났다. 8월10일 회의에서 남일은 2시간11분간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공산측의 비열하고 난폭한 언동은 매일처럼 되풀이 됐지만 이것을 제지하거나 고쳐줄 방법은 없었다. 일례를 들면 어느 날 남일은 내가 50분이나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고 트집을 잡았는데 그 다음날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1시간10분이나 떠들어댔다. 이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여서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었다. 공산 측이 회담을 이렇게 질질 끄는 것은 우리들이 시찰여행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헬리콥터」에 견줄 수 있는 비행기를 그 어느 소련인이 발명해주기를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닌 가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군사분계선 문제는 지도를 중심으로 토의하자고 했으나, 그들은 이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8월16일이 되자 쌍방수석대표는 서로 군사분계선 문제에 대해서는 보따리를 다 풀어놓아 더 이상 할 말이 없게되었다. 이날 「조이」대표는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여기서 이 문제교착을 다루도록 제안했는데 공산 측도 이에 동의했다. 이래서 8월17일부터 이 문제는 분과위원회로 넘어갔는데 여기서도 쌍방의 의견대립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분과위원회의「유엔」군측 대표는 「헨리·I·호데스」소장(정대표)과 「로렌스·C·크레이기」소장(부대표)이었고, 공산 측은 이상조 소장과 사방소장(중공군)이었다.
군사분계선을 둘러싼 「호데스」소장과 이상조의 설전도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 회의 못지 않게 치열한 것이었다. 다만 「호데스」소장의 강경한 성품과 몸에 밴 반공의식이 작용한 탓인지 차분한 「조이」제독과는 달리, 그는 「이빨에는 이빨로 눈에는 눈으로」식의 응보전술로 이상조와 대적한 것이 이 분위회의의 특색이었다.

<군사정세에 그리 무식한가>
▲「호데스」=『회담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공산 측은 38선 안을 포기할 수 없는가?』
▲이상조=『38선 분계선제안은 우리의 굽힐 수 없는 주장이다.』
▲「호데스」=『우리는 이상 더 양보 못하겠다.』
▲이=『우리도 못한다.』
▲「호데스」=『그러면 다른 제안은 없는가?』
▲이=『없다.』
▲「호데스」=『우리는 38선 이외의 제안이라면 논의할 용의가 있다.』
▲이=『당신네들이 현 전선을 고집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38선까지 남진하겠다.』
▲「호데스」=『그러면 왜 남진을 하지 않는가?』
▲이=『평화적 해결을 바라기 때문이다.』
▲「호데스」=『당신은 군 지휘관이면서 왜 그렇게 군사지식에 무식한가? 당신은 올 봄의 소위 당신네들 춘계공세에서 공산군이 얼마나 죽었는지 잊었는가?』
▲이=『….』
「호데스」소장은 8월20일에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그 선을 중심으로 너비 4㎞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앞서의 본 회의 때에 「조이」제독이 내놓은 것보다는 상당히 후퇴한 제안이었다. 이에 대해 이상조는 「유엔」군 측이 접촉선 안을 포기하고 38선 안을 수락하면, 서부전선에서 연백평야와 웅진반도를 거저 얻게된다고 생색을 내기도 하였다. 공산측은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는 38선 이북의 중요전략지대와 서부의 미 수복지구를 맞바꾸자는 속셈이었다.
한편 「조이」제독은 군사분계선 토의를 분과위원회에 넘기고는 동경에 갈 채비를 차렸다. 한 달 넘어 공산 측과 대결하는 동안 이제 그들의 의도나 전술을 어지간히 알게 된 「조이」제독은 어떤 판가름을 낼 시기가 왔다고 판단, 「리지웨이」사령관과 직접 이 문제를 상의하려고 한 것이다. 「조이」제독은 공산 측에 「유엔」군측 제안을 수락하겠느냐 않겠느냐의 최후통첩을 낼 생각이었다.
8월19일에 「조이」제독은 동경으로 가는 도중 서울에 들려 「밴플리트」 8군사령관과 회담하였다. 「밴플리트」장군은 현 접촉선에서의 전투중지와 협소한 비무장지대 설치안에 찬성하면서 최후통첩은 동부에서의 전선정리를 위해 계획되고 있는 「유엔」군의 제한공세 전개시기와 일치한 9월 초순이 적절할 것 같다고 말하였다. 「리지웨이」사령관도 「조이」제독 견해에 흥미와 관심을 표명했지만 대일 강화조약회의가 다가온 만큼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미국은 한국전 발발과 함께 대일 강화조약체결을 서둘러 1951년 8월15일에는 초안을 발표하고 9월4일에는 「샌프런시스코」에서 조약회의를 개최하여 9월8일에 조인할 계획을 세우고있었다.

<미, 대일 강화조약 차질염려>
이런 마당에 「유엔」군측이 「최후통첩」 발송 같은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면 「유럽」동맹국들을 자극시켜 대일 강화조약체결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국무성은 염려한 것이다. 이렇게 한국전쟁은 전쟁터에서나 회의탁자에서나 「유럽」동맹국들에 대한 「워싱턴」의 「정치고려」로 말미암아 번번이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여하튼 단단한 결의와 각오를 가지고 동경으로 비행했던 「조이」제독은 실의에 잠긴 채 빈손으로 8월21일에 문산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남일과 끝없는 「입씨름」과 「눈 씨름」을 벌일 생각을 하니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가 났다. 그러나 「조이」로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달 동안 남일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공산측이 회담중단의 구실로 삼으려고 날조했다는 것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조이」제독이 문산에 돌아온 다음날인 8월22일 밤11시30분에 공산 측은 전화로 미군기가 지금 막 개성회의장소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고 알려왔다. 그러고서는 이 사실을 즉시 조사하자고 요구했다. 「유엔」군측 연락장교인 「앤드루·키니」공군대령과 「제임즈·C·머리」해병대령은 부랴부랴 「지프」를 몰고 23일 상오1시45분에 개성회의장에 도착하였다.
회의장 앞문에는 이미 공산측 연락장교인 장춘산 대좌와 제청문 중좌(중공군), 그리고 그들 보도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은 이 때에 주고받은 양측 수석연락장교의 문답내용.
▲장춘산=『미군기가 22일 하오11시20분에 이 지역을 폭격했다. 남일 대표를 비롯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
▲「키니」=『누가 당신들이 주장하는 미 공군 폭격을 보았다는 것인가?』
▲장=『이 부근의 모두가 비행기 폭음을 들었고, 폭탄은 회의장 중립지대 안에 떨어졌다.』
▲「키니」=『폭탄? 한 개인가 두 개인가?』
▲장=『나는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우리측이 조사중이니 나중에 물어보라.』
▲「키니」=『장대좌나 제중좌도 폭음을 직접 들었다는 것인가?』
▲장=『우리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들었다. 미군기는 저공으로 날면서 인삼 장으로 가는 길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거기 가보면 알게 될 것이다.』
▲「키니」=『비행기는 한 대인가 또는 그 이상이었는가?』
▲장=『미군기 폭격을 미리 통고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몇 대인지 모르겠다. 하도 놀라서 대수는 알 수 없다.』

<"대표단 차 위에도 파편 있다">
▲「키니」=「여기 있는 사람 중에 몇 대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
▲장=『이제 조사해보면 알 것이다. 이 파편이 우리 대표단 차 위에서 발견되었다.』
▲「키니」=『폭격 증거품은 무엇인가?』
▲장=『이제 보게 될 것이다.』
◆주요일지(1951년8월9·10·11일)
※8월9일 ▲아군, 화천북방서 4㎞진격 ▲서해안 일대의 적기뇌 완전제거 ▲공산 측, 휴전회담재개요구 ▲이기붕 국방, 일 대표와 요담 ▲5천의 「필리핀」군, 공산 「훅」단 소탕전개시
※8월10일 ▲미 공군, 북한 각지서 2천대의 적 차량 발견코 공격 ▲재개된 휴전회담 여전 교착 ▲공산 측, 미군기가 자기 측 대표차량을 공격했다고 트집 ▲「뉴요크·타임스」, 휴전은 한국민의 복지를 위한 것이라고 논평
※8월11일 ▲평양방송, 미군이 독「개스」사용했다고 비난 ▲12차 휴전회담 무진전 ▲김성수 부통령, 부산의 「스웨덴」병원서 퇴원 ▲이 국방, 거창사건 관련자 엄단언명 ▲북평방송, 미국이 휴전회담 교착시키고 있다고 비난
※알림=「민족의 증언」문고나 연락전화는 (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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