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아름다워서 … 선수 떠날 때 함박 웃는 김성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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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호 19면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이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과 ‘하이 파이브’를 하고 있다. 원더스는 지금까지 17명을 프로구단으로 내보냈다. [사진 고양원더스 페이스북]

김성근(71) 고양 원더스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김태룡 두산 단장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 왼손 투수를 달래. 아마 내일 공식 발표가 날 거야.”

기적의 외인구단 ‘고양원더스’

 김 감독 말대로 프로야구 두산은 지난 8일 원더스 투수 여정호(29)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국내 유일의 독립야구단에서는 많은 꿈이 자라고 있다. 원더스에서 1년 동안 뛴 여정호는 프로구단에 재입단했다. 부산상고-동국대를 졸업한 그는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해 넥센에서 배팅볼 투수로 일했다. 2011년 신생팀 NC에 선수로 입단했지만 부상 때문에 곧 방출됐다.

 두 차례의 큰 실패를 경험한 여정호는 꿈을 잃었다. 그저 열정만 남았다. 원더스가 그에게 기회를 줬다. 원더스의 모토는 ‘열정에게 기회를’이다. 여정호는 올 시즌 퓨처스(프로 2군)리그 경기에 불펜투수로 등판했고, 두산의 눈에 들었다. 품 안의 선수가 프로로 떠날 때마다 김 감독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름다운 이별이다.

 2011년 9월 창단한 원더스는 올해 12명의 선수들을 프로구단으로 보냈다. 지난해 5명을 포함해 2년 동안 원더스 선수 17명이 프로에 입단했다. 원더스 선수 대부분은 프로구단에서 쫓겨났거나 아예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들이 김 감독의 지도를 받고, 원더스의 지원을 받아 프로선수가 되는 것이다.

폭우 속의 훈련으로 단련
지난 7일 중앙SUNDAY와 만난 김 감독은 6월 어느 날 얘기를 꺼냈다. “코치들한테 당분간 출근하지 말라고 했어. 내가 선수들을 직접 가르치겠다고 했지. 첫날이 6월 1일이었을 거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라고. ‘잘됐다’ 싶었지. 40여 명의 선수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치고 던지고 달렸어.”

 어찌 보면 미친 짓이다. 실내훈련장이 잘 갖춰져 있는데 일흔 살 넘은 노장이 폭우를 맞아가며 흙바닥에서 구르는 건 비효율적인 훈련이다. 김 감독의 말. “실내에서 했다면 그냥 그런 훈련으로 끝났겠지. 그러나 그때 원더스에는 뭔가 더 절박한 게 필요했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 말이야….”

 당시 원더스는 선수 6명을 한꺼번에 프로로 보냈다. 그들에겐 더 없는 축복이고, 김 감독과 원더스엔 최고의 보람이다. 그러나 원더스 전력엔 큰 공백이 생겼다. 주전 선수들이 동시에 빠져나가자 라인업을 짜기조차 어려워졌다. 원더스는 소속 선수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전력이 약해지는 모순적 구조를 갖고 있다.

 방법은 후보 선수를 단기간에 주전 선수로 키우는 수밖에 없다. 팀 전체에 자극을 주기 위해 김 감독은 코치들을 대신해 직접 나섰다. 그는 “내가 비를 맞는데 선수들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나. 나흘이 지나자 선수들 눈빛이 바뀌었어. 독해지더라고. 거기서 또 희망을 봤어. 그 나흘이 원더스를 다시 바꿨지”라고 말했다.

 선수들이 대거 빠져나간 뒤에도 원더스에선 새로운 선수들이 성장했다. 일부는 또 프로로 갔지만 원더스 성적은 더 좋아졌다. 올해 원더스는 퓨처스팀과의 교류경기에서 27승6무15패를 기록했다. 프로 이하의 선수들이 프로를 상대로 승률 0.643을 올린 것이다. 선수를 계속 내보내도 새로운 선수가 계속 나왔다. 원더스 야구는 화수분이다.
 
외국인 선수도 허리 꺾어 인사
원더스가 처음 탄생했을 때만 해도 의혹의 시선이 많았다. 동호회 야구선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이들을 모아 놓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허민(37) 원더스 구단주는 SK에서 해임된 ‘야신(野神)’ 김 감독을 영입했다. 최고의 지도자를 데려와 최고의 육성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지난해 7월 왼손투수 이희성(26)이 LG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야구 전문가들은 그저 기적이라고 했다. 원더스의 기적을 17번이나 만들었다.

 원더스는 탄생부터 특이했다. 허 구단주가 사회공헌 차원에서 야구단을 창단했다. 프로선수를 꿈꾸는 이들에게 프로선수와 겨룰 기회를 주고, 프로구단이 원더스 선수를 원하면 돈(이적료) 한 푼 받지 않고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오히려 프로에 진출한 선수에게 허 구단주가 1000만원씩을 주고 있다. 프로구단에도 없는 퇴직금, 또는 전별금 제도가 원더스에는 있다.

 운영방식 또한 독특하다. 프로가 아니지만 최소한의 연봉(1000만~2000만원)을 지급한다. 연봉 산정은 구단이 아닌 김 감독이 한다. 그는 “성적보다 육성이 중요한 우리 팀 특성상 기록에 따라 연봉을 줄 수 없잖아. 그냥 내 느낌으로 정하는 거지. 이 녀석은 훈련 열심히 했으니까 200만원 올려주고, 이 녀석은 결혼했으니 100만원이라도 올려주고…”라고 말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 팀 선수들은 연봉이 깎이지 않아. 최소 100만원 이상 올라. 그러다 보면 총액이 예상보다 1억원 정도 넘치는데 허 구단주가 아무 말 없이 수용해줘”라며 웃었다.

 원더스는 프로와 학생 야구 중간의 형태로 운영된다. 경기력 유지를 위해 프로구단처럼 미국·일본 등에서 온 외국인 선수들도 서너 명 있다. 이들도 박봉을 받고 야구를 배우다가 고국으로 돌아가 프로에 재도전한다. 김 감독은 “인사성만큼은 우리가 대한민국 최고야. 외국인 선수도 감독이나 코치를 보면 자리에 멈춰 허리를 꺾어 인사한다고. 거기서 배우는 자세가 시작되는 거지”라고 말했다.
 
원더스에서 둥지 튼 야생마 이상훈
훈련 비용만큼은 프로구단 못지않게 쓴다. 고양시 대화동에 위치한 구장과 실내훈련 시설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매년 가을에 제주도로, 겨울에는 일본 고치(高知)로 대규모 전지훈련을 떠난다. 허 구단주는 원더스에 연 40억~50억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단을 운영하며 생기는 적은 수익도 모두 기부한다. 원더스는 지난해 입장수익을 다문화가족 아이들로 구성된 고양 무지개리틀야구단에 지원했다. 올해는 고양 여자야구팀 레이커스에 수익금을 전달했다.

 작은 기적을 만드는 원더스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그들에게 원더스 입단은 ‘패자부활전’이다. 원더스에 입단하는 순간, 원더스를 떠나 프로로 가는 발전적 이별을 꿈꾼다. 선수들의 절박한 마음만큼 원더스의 존재 가치가 커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김수경(34) 넥센 투수코치가 원더스에 입단해 화제가 됐다. 1998년 신인왕, 2000년 다승왕 출신인 그는 지난해 은퇴 후 코치로 활동했다. 젊은 나이에 마운드와 이별한 김수경은 프로코치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선수로서 재도전을 선택했다.

 따지고 보면 김 감독도 원더스에서 재활하고 있다. 그는 아마추어 감독으로 여섯 번, 프로 감독으로 여섯 번 해고됐다. 13번째 직장 원더스에서 김 감독은 참 행복해 보였다.

 좀처럼 코치 칭찬을 하는 법이 없는 김 감독이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투수코치 있잖아. 정말 최고야. 감독 뜻을 알고 영리하게 움직여. 잘 가르치고 성실해. 선수 때 이미지와는 전혀 달라.” 그가 말하는 코치는 긴 갈깃머리를 휘날리며 강속구를 던졌던 왼손 투수 이상훈(42·전 LG)이었다. 선수 은퇴 후 록밴드에서 활동했던 ‘야생마’ 이상훈은 1년 전 원더스 코치로 그라운드에 돌아왔다. 독립야구단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원더스의 원더(wonder·경이로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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