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3)<제자는 필자>|<제26화>경무대 사계(20)|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각 비화>(나)
이화 장엔 본 채와 따로 떨어져 정원을 거쳐 언덕 위에 조그만 별채가 하나 있다.
본격적인 조각작업은 이 별채에서 행해졌다. 이 박사는 조각문제에 관계되는 사람만을 별채에 들어오게 했고 조각을 위한 갖가지 자료는 모두 이 별채에 보관하고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도록 출입을 통제했다.
이래서 누가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별채는 어느새「조각 당」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어떻든 이름그대로 이 별채에선 대한민국의 초대내각을 탄생키 위한 진통으로 붐볐다.
이 박사는 인 촌을 믿고 좋아했기 때문에 오히려 대통령제하의 할 일 없는 총리보다는 실권도 있고 맡아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 재무장관을 맡겨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국무총리를 두고 이 박사는 한동안 이북에 있는 조만식씨를 생각하고 몇 사람에겐 그런 뜻을 비쳤던 것 같다.
그러나 한민 당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이 박사 측근들은 『이곳에도 총리를 맡을 만한 자격자는 얼마든지 있는데 이북에서 올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조만식 선생을 총리로 임명하는 모험을 왜 하시려느냐』고 반대했다. 사실 이 박사로서도 조 선생이 이북에서 내려올 수 있으리라고 믿기는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으로 선거를 해서 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을 맡으면서 이북동포들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박사는 남북사람들이 화목하고 서로 협력해야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랬기 때문인지 이 박사는 누구와도 별다른 상의 없이, 또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이북출신인 이윤영씨를 총리로 지명하여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이런 예상 밖의 지명에 대해 모두들 어리둥절했다고 국회의 모든 정파들이 한마디로 기막힌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도 이 박사는 이렇다 할 설명이나 설득도 없이 국회에다 이윤영 총리 인준을 요청했다.
7월27일 제35차 국회본회의는 인준표결에 들어갔다. 표결직전 국회에선 곳곳에서 수근대는 의원들 사이에서 간간이 어이없다는 웃음이 흘러나오는 형편이었으니 결과는 뻔했다.
투표결과는 이런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돼 재 석 1백93명중 가59표 부 1백32표 기권 2표로 압도적 다수의 부결이었다.
국회표결결과가 밝혀진 뒤 이 박사에게 『이우영씨 총리 안이 망신만 당했습니다』고 보고했더니 이 박사는『그래 부결됐어!』라고 덤덤히 말할 뿐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박사는 이윤영씨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부결을 내다봤고 설혹 몇 정파를 불러 설득한다해도 효력이 없으리란 점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씨를 지명한 것은 역시 조만식 선생을 거론했던 것과 꼭 같은 정치적 고려였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남쪽의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지켜보고 있은 이북동포에 대한 「메시지」였다고 해석된다.
이윤영 총리 안이 부결되자 이 박사는 이미 마음을 경하고 있었던 듯 지체없이 철기 이범석 장군에 대한 총리지명작업을 시작했다.
이박사가 철기장군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려는 데는 여러 가지 고려가 작용한 듯 하다.
우선 철기장군은 정계에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지만 국민에게는 광복군을 이끌었다는 것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그 위에 미 극동군사령부의 「맥아더」원수, 미국무성의「웨드마이어」장군, 그리고 군정의「헬맥」장군 등이 추천을 했다.
국내에서는 이 인·장택상씨 등이 적극 철기를 지지했다. 이박사가 철기장군과 얼굴을 맞댄 것은 환 국 후이었지만 김좌진 장군 밑에서 광복군을 이끌고 고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광복군시절 이 박사는「웨드마이어」중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철기장군을 소개한 일이 있으며 이 연유로 광복군은 「웨드마이어」장군의 도움을 받은 일도 있었다.
환국 후 이박사가「하지」와 싸우고 있는 사이에 철기가 군정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며 전국적인 청년조직을 넓혀가고 있을 때 이 박사는 한때 철기장군이 사조직을 하지 않나 하고 오해한 일도 있었다. 이 박사는 민족청년단을 중국의 가양병 같이 못마땅하게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철기를 믿었다. 그것은 족 청에 대해 공산당이 들어있다느니 하는 각종 모략이 있었지만 당시 흔하던 공산당「푸락치」사건 하나 족 청 안에선 없었고 또「민족지상」「국가지상」을 내건 족 청이 혼란한 시기에 청년을 단결시키는데 공이 컸기 때문이다.
철기를 총리로 내정한 이 박사는 이번에는 전과 달리 연일 국회간부들을 이화 장으로 불러들여 예비공작을 활발히 추진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은 무소속대표들은 자기네들 의견을 이박사가 한번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조소앙 총리 안을 이 박사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영향력이 큰 한민 당은 그들대로 인 촌 총리 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여 철기 안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박사의 간곡한 설득은 차츰 효과를 나타냈다. 인 촌을 비롯한 한민 당 간부들은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한다면 정부수립도 늦어지고 결국 한민 당은 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리하여 인 촌은 한민 당은 철기 총리 안을 지지하도록 결단을 내려 간부들을 설득했다.
인 촌은 이런 결점을 내린 후 철기를 비밀리에 만나 그 동안의 한민 당 사정을 설명하고 장관임명에 적극적인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철기인준을 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인 촌은 총리인준 문제를 두고 어떤 타협을 할 생각은 없었으나 당내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8월2일 국회본회의는 이범석 총리임명을 재 석 1백97명중 가 1백10표, 부 84표, 무효 3표로 인준했다. 이 표결에서 무소속은 거의가 반대표를 던져 그들의 불만을 감추지 않고 발산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