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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 난독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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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갑생
JTBC 사회 1부장

난독증(難讀症). 지능이나 시각, 청력에 문제가 없음에도 단어나 철자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증상을 뜻하는 의학용어다. 난독증이 있으면 다양한 표지판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 그래서 간혹 표지판 내용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할 가능성도 높다. 난독증이 갑자기 확산된 걸까. 요즘 거리에서 그 증세가 의심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연표지 앞에서 버젓이 흡연하는 사람들이다. 문화재 주변, 건물 입구 주변 등등 분명히 ‘금연’ 표지가 붙어 있는데도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운다. 금연표지 주변에 쌓여 있는 담배꽁초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정차 금지 표지판 주변도 마찬가지다. 평일도 그렇지만 주말엔 거의 무법천지다. 심지어 버스 정류장 주변까지 불법 주정차 차량들이 점거한다. 이 때문에 버스들이 승강장에 붙어서지 못하고 도로 중간에서 승객을 내리고 태우기 일쑤다.

 주정차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보행통로나 횡단보도를 점령하는 것도 예사다. 특히 나들이객이 많은 명소 주변에선 횡단보도나 보행통로를 가로막고 주차된 차량들을 종종 보게 된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옆으로 서서 지나갈 정도의 공간만 남겨놓고 온통 얌체 차량들이 점령하고 있다.

 도로 위에 그려진 차량정지선도 예외는 아니다. 정지선은 규정상 차량 범퍼나 차체가 넘어가지 않게 멈춰야 하는 기준선이자 표지다. 보행자 안전과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서다. 그런데 영 잘 지켜지지 않는다. 차량이 거의 다 넘어서는 건 물론 아예 지나쳐서 횡단보도 위에서 멈추기도 한다. 차량 정체가 심해서, 밀려가다가 의도치 않게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소통이 원활한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정지선을 무시하는 차량이 의외로 많다. 아니 흔하디 흔하다.

 문제는 대부분이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진짜 난독증이 아니란 거다. 필요에 따라, 이익에 따라 일부러 표지를 모른 체, 못 본 체하는 거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선택적 난독증’이라고나 할까. 행정기관의 허술하고 원칙 없는 행정도 선택적 난독증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특히 불법 주정차의 경우 주말엔 거의 단속이 이뤄지지 않는다. 나들이객 편의를 위해 갓길 주차는 나름 편의를 봐줄 수 있다고 치자. 그래도 횡단보도나 보행통로 점령은 절대 용납해선 안 된다. 최소한의 보행자 편의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과도하고 습관적인 정지선 위반도 강력히 지속적으로 단속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위반했다가 걸려도 ‘내가 잘못해서 걸렸구나’ 대신 ‘재수없어서 걸렸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항의도, 불만도 줄어들 게다.

 서로가 자기에게 유리한 표지만 지키고 반대 표지는 애써 못 본 척 산다면 어찌될까. 또 행정기관이 단속하고 싶은 것만 단속하고 다른 위반은 못 본 척한다면 어떨까. 혼란의 대가는 결국 우리 모두의 불편과 불안, 위험으로 돌아올 게 뻔하다. 선택적 난독증, 이젠 그만 떨쳐 버리자.

강갑생 JTBC 사회 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