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서 28년 나는 이렇게 살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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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44년 서른 살 되던 해 만주의 보급부대에서 근무하던 나는 「괌」도의 29사단에 배속되어 비행장건설에 동원됐다.
9월 어느 날 미군이 상륙하여 2만 여명의 육해군 혼성부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하룻밤사이에 궤멸,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30여명의 전우와 함께 「정글」에 숨어 미군에 대해 야습을 하곤 했으나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얼마 후 서로가 의견이 엇갈리기도 하고 낙오자도 생겨 1년 후에는 6명만이 함께 남았다. 정글에 숨은 지 반년쯤 지나 산꼭대기에서 확성기로 구성진 노랫가락을 틀며 『무사할 테니 미군에 항복하라』는 권유가 있었다. 대장으로 있던 해군대위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미군에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노랫가락에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렸다.
14년 가량 지난 후 식량이 떨어져 「시찌」 「나까바다」 3명만이 남아 함께 지냈다.
처음에는 갈대로 움막을 지어 살았다. 그동안 우리는 먹이를 구하러 냇가에 나가는 길에 신문쪽지를 주워 전쟁이 끝난 것은 알았으나 일본이 항복한 줄은 몰랐다.
군에 있을 동안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야마도 정신으로 꽃떨기 처럼 목숨을 바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까왔다.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먹을 것으로는 냇가에 나가 가재·뱀장어를 잡거나 나무열매를 따서 목숨을 이어갔다. 때로는 쥐나 달팽이도 잡아먹었다. 처음에는 가지고 있던 회중전 등의 렌즈를 써서 일광을 모아 불을 일으켜 익혀먹었다.
그러나 렌즈를 잃어 버려 나무에 구멍을 뚫고 막대기를 비벼 불을 만들어 썼다. 불씨가 한번 꺼지면 다시 마련하기 어려워 아마껍질을 실처럼 길게 늘어뜨려 꺼지지 않도록 했다.
나는 입대하기 전 양복점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나무껍질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었다. 강가에 나갔다가 주운 셀룰로이드 조각으로 단추를 만들어 달기도 했다.
8년 전쯤 우리 세 사람은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위험하고 식량도 달리니 헤어지기로 의논, 두 사람은 강 건너서 따로따로 살게됐다. 우리는 이따금 서로 동료를 찾아가곤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두 전우를 만난 것은 8년 전쯤 찾아갔을 때 영양실조로 빼빼 말라 『아이구 아파. 아파 죽겠어. 등 좀 두드려주게』하며 마구 흐느껴댔다. 전우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니 살아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나중에 다시 찾아갔을 때 이들은 모두 숨을 거둔지 오랜 후였다.
아마 모두 굶어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땅굴을 파고 살기 시작한 것은 15년쯤. 냇가의 대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3m쯤 아래로 파 내려가 옆으로 4m쯤 파 들어갔다. 웅크리고 앉으면 머리가 꼭대기에 닿을 정도까지 팠다.
살림도구는 아쉬운 대로 마련했다. 전쟁터라 쇠붙이도 많아 쇳조각을 갈아 칼을 세개 장만했다. 군대시에 가지고있던 가위를 소중히 간직, 머리를 자르고 손·발톱을 깎았다. 소통을 쪼개서 숟가락을 만들어 썼다.
날이 얼마나 지난지 알기 위해 보름달을 보고 나무에 칼로 표시해놓아 지금까지 28년 지났다는 것을 알고있다.
28년 동안 세번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특히 산돼지를 잘못 요리해 먹어 탈이 났을 때는 꼭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 살면서도 미군에 잡힐까봐 무서웠다.
햇볕 쬘 엄두는 내지도 못하고 낮에는 꼼짝 않고 굴속에 누워 있다가 밤에만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
지금 이렇게 일본에 살아 돌아간다니 꽃떨기 처럼 목숨을 버리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외지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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