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3000원짜리 칩 때문에 … 트로트계 밥줄 끊길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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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불법 음원 SD카드 유통업체들에서 압수한 SD카드(오른쪽). 왼쪽 오디오 플레이어는 압수대상이 아니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11일 오전 8시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완구거리. 가게들이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 이른 시간.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특별사법경찰 8명과 저작권보호센터 직원 12명이 골목에 들어섰다.

 “업체에 들어가면 먼저 불법 SD카드를 확보하세요.”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이들은 불법 음원이 저장된 ‘SD카드(Secure Digital Card·우표 크기의 플래시 메모리 카드)’를 전국으로 유통시키는 것으로 조사된 J·I·G·M사 등 4개 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작했다. 먼저 골목 입구에 있는 M업체로 이완규 수사관 등 5명이 들이닥쳤다. 그동안 조사를 받았던 상인들이 ‘불법 SD카드와 오디오 플레이어를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공급한 도매상’으로 지목한 곳이다.

40여 평 크기의 가게 한쪽 벽면 선반엔 오디오 플레이어 1000여 개가 가득 차 있었다. 또 100개 단위로 포장돼 전국 소매상으로 내려갈 채비를 마친 박스도 16개나 됐다. 수사관들은 업체에 들어간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계산대 쪽 책상에서 불법 음원이 저장된 SD카드 5000여 개(저작권 침해액 약 50억원)를 찾아냈다. 2층 창고에선 ‘노래 목록집’ 수천 권이 발견됐다. 노래 목록집은 불법 SD카드와 오디오 플레이어를 산 사람이 쉽게 선곡할 수 있도록 노래 제목과 번호를 써놓은 책자다.

 이 수사관이 “불법 SD카드는 어디서 제작하느냐”고 묻자 사장 이모(57)씨는 “다른 곳에서 사온 것”이라고 답했다. 거래내역서와 통장을 압수하겠다고 추궁하자 “현금으로 거래하면서 따로 거래내역서를 만들지 않았다”고 버텼다. 그러나 깊숙이 감춰둔 컴퓨터에서 불법 음원 수천 곡과 함께 SD카드에 음원을 저장할 수 있는 SD카드리더기 수십 개가 추가로 발견되자 이씨는 “일부는 우리가 제작했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이날 하루 창신동 4개 업체에서 압수된 물품은 8131개의 SD카드, 노래 목록집 1만8242개 등이었다. 개당 최소 2000곡이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면 약 1700만 곡의 노래가 불법으로 유통될 뻔한 걸 방지한 것이다. 저작권 침해액으로 환산하면 최소 85억여원이다.

 첫 단속은 지난해 7월 경기도 안양시 안양천에서 진행돼 지난달까지 총 387차례 단속이 이뤄졌다. 그동안 SD카드 2319개 등을 압수하고 카드 안에 포함된 저작권 침해 음원 258만7663건을 확인했다. 한국음반산업협회 측은 “불법 SD카드가 내장된 오디오 플레이어가 200만 대가량 팔리고, 이로 인한 피해액이 800억원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협회의 한 관계자는 “가수 남진·장윤정씨도 큰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며 “특히 2009년 발표된 두 사람의 듀엣곡 ‘당신이 좋아’도 피해곡”이라고 전했다.

 SD카드는 ‘어르신들의 불법 음원 창고’로 불린다. 예전에는 주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이뤄지던 불법 음원 유통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화한 것이다. 카세트 테이프에 20~30곡이 들어가는 데 비해 SD카드에는 2000곡 이상 저장 가능하다. SD카드가 이른바 ‘효도 라디오’의 핵심인 이유다. 올해 초 불법 SD카드와 오디오 플레이어 제품의 판매가 급증하면서 라디오와 음악만 듣는 기능에 동영상을 볼 수 있는 기능을 더한 제품까지 나왔다. 노인층이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선 “SD카드 플레이어가 없으면 왕따”라는 말도 돈다고 한다. 이완규 수사관은 “인터넷 등을 이용해 원하는 동영상을 얻기 힘든 60대 이상을 대상으로 트로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등을 SD카드에 저장해 판매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불법 SD카드는 가격이 개당 3000원가량 한다. 라디오 겸용 오디오 플레이어와 함께 팔리는 데 3W(와트) 출력을 기준으로 최소 2만5000원이다.

또 청력이 약한 노인층이 더 크게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출력을 6W까지 늘리고 영상을 볼 수 있게 한 제품은 7만원에 거래된다. 주로 50대 이상 연령층이 많이 모이는 등산로 입구, 시장,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거래되고 있다.

 SD카드에 음원을 담아 상습적으로 판매하면 복제권 침해다. 저작권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보호과 김영윤 사무관은 “최근 저작권 침해물이 음원에서 영상으로 확대되는 만큼 불법 SD카드 제작자를 적발하는 데 수사의 초점을 맞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종문 기자

일명 '효도 라디오'=라디오와 오디오 기능 을 갖춘 플레이어에 수천 곡의 노래가 저장된 SD카드를 꽂아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한 제품을 말한다. 전파 인증을 받은 플레이어는 불법이 아니지만, SD카드에 저장된 음원은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불법 음원이 대부분이다. 불법 음원이 저장된 SD카드를 상습적으로 판매할 경우 저작권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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