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59)-제자는 필자|<제25화>「카페」시절(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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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0년 전후에 첫선>
필자 이서구씨(73)는 동아일보기자(20년), 토월회동인(26년), 대한극작가 협회장(45년), 대한무대예술원장(49년), 국방부종군극작가단장(52년), 한국방송인협회이사장(66년) 등을 역임하고 현재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나라 원로 극작가중의 한 분이며, 방송사극장희빈, 강화도령, 민며느리, 상궁나인 등을 집필, 시청자들의 인기를 모은바 있는 필자는 이런 풍부한 경험과 기록을 더듬어 『「카페」시절』을 통해 노익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주>
우리나라에 「카페」(cafe)가 첫선을 보인 것은 서기 1920년 전후였다. 물론 일본인들이 시작한 것이지만 서울에 「카페」가 등장하면서부터 젊은이들의 술 마시고 노는 풍습에 큰 변화가 왔다. 「카페」 라는 이름의 술집은 신기하기도 하려니와, 종래의 요릿집이나 내외주점(내외주점)에 비하여 지극히 편리하며 자유로워서 인기였다.
요릿집에 가면 체면을 차려야 하고 술 따르고 권주가 부르는 기생을 부르는데도 격식이 있어서 언어·행동에 체면·체통을 차려야 하니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카페」라는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아들이는데 그렇게 가볍고 무관할 수가 없다.
문턱에만 들어서면 신여성차림의 어여쁜 아가씨가 손목을 잡으며 환영이다. 요릿집에 가서는 손님이 기생을 불러야 겨우 오지만 「카페」라는 데서는 해만 기울고 불만 켜지면 무수한 여급들이 미리 기다리다가 10년 그리는 서방님이나 만난 듯이 반가이 맞으니 젊은이들에게는 그렇게 편리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요릿집과 「카페」, 기생과 여급은 맞서게 된 것이다. 여급이라는 말은 일인들이 지어서 부르던 것이지만 쉽게 말해서 주석에서 시중을 드는 여자급사라는 말의 약칭이다.
양복을 입고 요릿집 장판방 보료 위에 앉으면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카페」에서는 편안한 의자에 걸터앉아 보니 우선 편리해서 좋다. 게다가 미희들은 다정한 애인이나 만난 듯이 다정하다. 봉건사회·구식가정에서 남녀유별이라는 철칙아래 청춘을 억누르던 젊은이들이 놀아난 것도 이해가 간다.
어쨌든지, 서울에 「카페」라는 색주가가 등장을 하면서부터 미인이 따르는 술을 마시고 밤을 즐기는 풍습에는 크나큰 변화가 오고 말았으니 꼬집어서 말을 하자면 기미년 독립운동을 치르고 나서 일인들이 한국청년들을 술과 계집으로 바보를 만들자는 고등정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지 서울 천지에는 「카페」라는 술집이 밤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명월관이나 국일관 같은 요릿집에는 돈 가지고도 못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들어간다 해도 보고싶은 기생이 다른 손님에게 불리웠으면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카페」에는 언제나 여급이 대기를 하고 있으니 가기만 하면 만난다. 게다가 술이나 안주는 손님이 청하는 대로 가져오니 요릿집보다는 훨씬 염가이다. 돈을 물쓰듯하고 체면을 차리는 부유한 고위층이라면 의젓한 자세로 요릿집 별방에서 버티고 지내지만 한창 뽐내는 젊은이들에게는 모두가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다.
이래서 서울에 「카폐」라는 신식 색주가가 등장을 하고 오랫동안 성황을 이루었다. 「카페」에서 일어난 일만해도 다채롭고 「카페」에서 빚어진 일만해도 형형색색. 그야말로 일제 통치하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그 얼마나 서글픈 처지에 낯을 붉히면서 그 울분을 풀어보려고 「카페」를 찾아가서 밤을 새워 노래를 불렀던가….
일인들이 판을 치고, 「죠센징」(조선인)이라면 종의 새끼·피압박자·식민지 백성이라는 온갖 멸시가 함께 뭉친 모욕인줄 뻔히 알건만 우리는 그자들에게 온종일 「죠센징」소리를 듣고도 무던히 참아야 했다. 『이 자식아 너는 왜놈이요, 쪽발이다』고 대꾸가 한마디 나올 법도 하건만 당장은 속이 시원하나 그 즉시로 배일 사상이 있다고 체포가 되니 차마 입을 못 벌린다. 그러나 「카페」에 가면 일녀가 반가이 맞는다. 여기서만은 일녀도 한국인을 손님으로 대접한다.
돈! 돈!
돈이 제갈량이라더니 일인들도 돈에 몰리면 딸을 「카페」에 내놓고 손님의 비위를 맞추고 「팁」이라는 「서비스」료를 우려낸다. 이래서 한국청년들이 온종일 왜놈들에게 무시·천대를 받다가도 해만 저물면 「카페」의 등불 아래로 모여든다.
여기만은 돈만 아는 별천지이다. 돈만 잘 주면 일녀들도 부드럽기 명주고름이다.
『「하이」! 「하이」!』(네! 네!)
소리를 연발하면서 웬만한 욕설쯤은 웃으며 받는다.
『야! 이 바보야, 술 좀 따러!』
이런 호령쯤은 미소지으며 굽실거린다.
서글픈 복수이지만 후련 했던가보다.
그래서 당시 젊이들에게는 「카페」에 가는 것을.
『왜년 욕 좀 하러가자.』했으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계속> 【이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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