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극 시대 72년의 진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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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벵골」분쟁은 국제무대에서의 초강대국들의 행동질서를 적나라하게 부각시켰다.
미·소·중공 3대국은 모두 이 사태에 간접적으로 개입, 각기 상이한 성과를 거둬들였다.
미국과 중공은 외교적인 패배와 양자간의 연계를, 소련은 또 한번의 승리를 얻었다.

<미국은 자신을 돌아볼 때>
미국은 거대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국가이성을 마비 당한 셈이다.
미국은 이제 자신의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새삼 자문해야할 입장이며,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그것을 옹호하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우려하게 되었다.
중공도 월남문제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미국에 대해 품어왔던 경계심을 앞으로는 소련에 대해서도 품어야만 하게 되었다.
소련은 과거 지중해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남아에서도 매우 유리한 전략을 추구하게 되었다.
특히 71년의 인·소 조약은 1939년 당시 독·소 조약이 여타의 「유럽」제국에 대해 끼쳤던 것과 동일한 영향을 「파키스탄」에 대해 끼쳤다.
중공의 신중성은 차치하고라도 오늘의 국제정치를 특징짓는 중요한 현상은 미국의 「신중성」이라 할 수 있다.

<중공진출, 미·소 체제 붕괴>
비록 잠정적인 현상이기는 하나 오늘의 국제정치의 월식경향은 「존·케네디」대통령이 추구했던 정책의 파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젊음과 패기와 재능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세계사는 그가 실천한 정책에 대해 숱한 난제를 안겨 주었다. 소련에 대한 「미사일·갭」이 점점 벌어지게 되자 「케네디」대통령은 군비증강에 매진, 미국이 소련에 뒤지고 있지 않나 하는 인식을 대외적으로 안겨주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로는 미·소간의 현상유지를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는 갈수록 더 막대한 경비지출을 댓가로 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출혈은 양자에 대해 다같이 손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나토」(NATO)와 관련해 볼 때 「유럽」방위를 위해 「케네디」가 천명한 『신축성의 시대와 수단의 선택』이란 명제는 「프랑스」의 「나토」탈퇴를 오히려 정당화시켰고 나아가 「유럽」방위체제 전체를 동요시켰을 뿐이다.
「이탈리아」에 있어서도 그의 『동방으로의 문호개방』공약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남미에서의 「발전을 위한 동맹」정책도 실패로 끝났다.
「쿠바」위기 역시 오늘날에 와서 볼 때는 소련이 원하던 대로 되었다고 밖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소련은 미국에 비해 엄청나게 뒤떨어졌던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아바나」에 「피델·카스트로」정권을 존속시켰는데 비해 미국은 「쿠바」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월남전에 관한 국방성 기밀문서가 폭로된 이후 사람들은 「케네디」·「번디」·「맥나마라」 등 당시의 「케네디·팀」의 상황판단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최근에 한 미국 외교관이 말했듯이 미국이 「케네디」가 처했던 바와 같은 난처한 곤경에서 헤어나려면 적어도 한 10여년은 더 걸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국의 능력감소에 병행해서 소·중공의 두 강대국의 경우엔 과거 어떤때 보다도 자유로운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소·중공은 제나름대로 미국의 퇴조와 거기에 따른 자신의 행동반경의 신장을 매우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방대한 인적자원과 60년대 이후의 독자노선 및 핵개발의 성공으로 인해 중공은 국내경제의 취약성을 상쇄할 수 있었다. 「프랑스」보다도 낮은 국민총생산에도 불구하고 중공은 국제무대에 극적으로 등장해 미·소 독점체제를 파괴, 이른바 삼극 국제질서를 이룩해 놓았다.

<인아대륙이 새 대결장으로>
중공의 이러한 국제적 진출은 그 독자노선 때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은 세계 제3위의 경제대국이면서도 국제무대에서 그처럼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62년 소련이 미국영토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병기를 소지했을 당시 백악관은 소련이 제2의 「초대국」임을 시인했다. 이제 1975년께면 미국의 도시들이 중공의 「미사일」공격권내에 들어가게 될 오늘날에 백악관은 또다시 제3의 「초대국」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할 처지다. 「닉슨」대통령의 북경행은 백악관이 중공에 강대국권의 일원이 될 권리를 성급히 인정하려는 정책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중공은 미국이나 마찬가지로 동맹국인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있어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이곳은 강대국들의 새로운 대결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은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는 것 같다. 소련의 입장에서 본다면 6일 전쟁은 「이스라엘」에 패배한 「아랍」민족의 성원을 받아 지중해에 거점을 마련한 절호의 「찬스」였다.
두 차례에 걸쳐 패배를 맛본 「이집트」는 군장비의 보충과 전쟁피해의 복구를 소련에만 의지했던 것이다.
그 댓가로 소련은 구주의 「에너지」자원(석유)공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중해 일대를 직접·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티토」·「프랑코」·「부르기바」 등 세 사람이 사라진 다음에 있다. 앞으로 이들이 없어지면 지중해일대에서의 소련의 외교는 새로운 국면의 침투를 전개할 것이다.
소련은 이미 71년8월의 인·소 우호조약으로 인도 및 남부「아시아」일대에서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소련은 인도와 함께 지중해의「아랍」국가에서 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세 번째 도약은 서부「유럽」에서 이뤄졌다. 즉 「유럽」안보회의의 제안이 만약 성공한다면 소련은 2차 대전 때의 영토병합을 승인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구주국가들의 「안보」를 보강하기 위해서는 소련이 군대의 5%나 10%정도를 감축하는 정도로서는 불충분하다. 소련의 잠재적군사력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숫자는 서구국가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는 것이다.
초강국들의 안보계획에 의하면 양극체제가 3극 체제로 이행됨에도 불구하고 이들 3강국의 영토는 불가침성을 갖는다. 소련은 미국이나 중공과 마찬가지로 어느 두 강국이 핵분쟁을 일으키면 결국 제3국의 승리만 굳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3극간의 관계는 양극사이의 관계보다 훨씬 안정적인 것이다.

<초강국 거역하는 중재인 없다>
반면에 외교면에서의 씨름은 한층 가열화한다. 3대강국은 제각기 영향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싸움을 벌이고, 세계는 더욱 어지럽게 되며 따라서 더욱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불안정은 약소국과 비핵산유국들의 희생을 통해 수행되며 미·중공·소 등 3강국은 이 노름판의 주역이 된다.
그리고 이들 초강국은 해외에서의 이러한 정치적 불안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여기에서 야기되는 분쟁은 하나하나가 이들 초강국의 목적에 따라 윤색되고 선동되는 것이다. 핵대결에 있어서는 군사동맹이나 연합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각자가 자기를 위해』자기 살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사동맹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초강국의 의사를 거역하는 「중재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의견의 차이가 야기되었을 때 결국 아무런 역할도 못하게 된다. 「파키스탄」사태는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했다. 「파키스탄」은 미국과 중공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소련이 단독으로 밀어주던 인도에 「벵골」땅을 잃고만 것이다.
이처럼 위기와 불안에 찬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약소국들에는 단 한 개의 왕도밖에 없다. 즉 자신의 안보와 독립은 자기스스로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병기가 있음으로써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갈로와」장군약력>
▲1911년 「파리」출생
▲1954∼57년 「나토」사령부에서 전략연구담당
▲1958년∼현재 「마르셀·다소」「미라지」항공기회사 중역 겸 영업부장
▲저서「핵시대의 전략」「공포의 균형」「평화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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