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적의 춘계공세(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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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군연대의 혈전>(1)
영국이 한국전쟁에 대해 취한 태도는 매우 「아이러니컬」했다.
「런던」정부는 「유엔」결의에 호응하여 재빨리 한국전에 1개 보병여단과 2개 포병대, 그리고 10여척의 군함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16개 「유엔」참전국 중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한국전에 제공된 많은 전투병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특히 중공개입 후부터는 사사건건 「워싱턴」의 확전을 통한 종전기도에 제동을 걸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50년11월30일에 「트루먼」대통령의 원폭사용불사성명이 발표되자, 「클러먼토·애를리」수상이 급히 「워싱턴」을 방문하여 이를 번의시킨 것과 「맥아더」해임에 갈채를 보낸 사실 등을 들 수 있겠다. (주=본 연재 255·259회 참조)이렇게 영국은 한국전에 대해서 일견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국정부의 이런 정책과는 관계없이 한국에 출전한 영국군들은 빛나는 전통에 어긋남이 없이 모두 용감히 싸웠다.
어느 전투이고 간에 용자와 겁자는 있는 법. 1951년4월과 5월에 한국산야를 피로 물들인 대결전에서도 이런 숱한 예를 남겼지만 영국군 「글로세스터셔」연대의 영웅적 항전은 전자의 특출한 경우였다.

<17세기 창설된 전승의 연대>
더우기 이 연대의 용전과 희생으로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전공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음은 여러 자료에서 간추린 「글로세스터셔」영군연대의 전기.
4월21일에 경원가도를 따라 서서히 밀고 올라가던 미 제3보병사단은 철원으로부터 10 「마일」지점에 이르렀다. 이 사단 왼쪽에는 4천병력의 영국군 제29여단과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강문봉 준장)이 포진하고 있었다. 4월22일 저녁에 중공군은 영국군여단이 지키는 1만7천「야드」전방에 5만이 넘는 6개 사단병력으로 달려들었다.
4월23일의 성「조지」날 전날 저녁에 영국군 제29여단의 「노덤벌랜드·퓨질리어」연대의 제1대대는 임진강 남안에, 「글로세스터셔」연대의 제1대대와 「벨기에」군대대는 여단본부좌측에, 그리고 「얼스터」소총연대의 제1대대는 예비병력으로 후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단의 지원부대는 제45포병대와 제8 「센튜리언·탱크」부대였다. 이 모든 부대는 긴 역사와 전승의 기록을 자랑하는 부대였다. 「퓨질리어」연대가 창설된 것은 1674년으로 이 연대 장병들은 성「조지」와 그의 용의 「배지」를 군모에 달고있다.
「글로세스터셔」연대는 1694년에 창설된 이래 연대기는 「워털루」「퀴벡」「칼리폴리」 등 역전의 싸움터에서 나부꼈다. 195l년4월22일 「글로세스터셔」의 연대기는 44번째로 임진강변에 펄럭거렸다.
영국의 궁수들이 가슴에 붉은 적십자를 달고 다닐 때부터 그들의 수호신인 성「조지」의 날은 영군에는 신성하고도 엄숙한 축제일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은 이 성「조지」의 축제를 벌일 수 없었다. 하지만 제29여단의 장병들은 장미를 군모에 달 시간은 있었다. 「에이커」나 「아재크르」에 이르는 격전을 통해서도 이 부대 선임자들이 일찌기 겪어보지 못했던 처절한 혈전에 영국군은 모자에 장미를 단 채 휘말려 들어갔다. 중공군은 성「조지」날 전일인 4월22일 정각 하오 6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피리·나팔불며 밀어닥쳐>
임진강을 건너가 있던「벨기에」군이 맨먼저 포위당했고 그 다음은「노덤벌랜드·퓨질리어」연대가 공격을 받았다.
포위된 「벨기에」부대를 구출하려고 처음에는 「얼스터」연대의 1개 보병대대가 그 다음에는 「탱크」부대가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영국군에 배속된 이 「벨기에」군 대대는 이날 밤부터 영국군단본부와 연락이 끊겼으나 비교적 큰 병력손실을 입지 않고 버티다가 23일 아침에 그들 우측에 있는 중공군 옆으로 빠져 나오는데 성공했다.
4월23일 새벽1시에 중공군주공은 여단좌측의 「글로세스터셔」연대의 제1대대가 지키고 있던 4「마일」전선으로 옮겨졌다. 맑게 갠 서늘한 밤에 중공군은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물밀듯 임진강을 건너왔다. 제1파는 최전방 A중대로 밀어닥쳐 중대장과 다른 2명의 장교를 쓰러뜨리고 중대본부를 습격하였다.
중대통신병은 실탄이 떨어지자 총대로 어둠 속에 몰려드는 중공군을 후려갈겼다.
그리고 불꽃이 난무하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한테 에워싸이자 무전기가 있는 곳으로 기어가 『중대는 유린당했소. 그럼 잘있소』하고 최후의 연락을 했다. 제1대대의 그 밖의 중대는 진지를 고수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만7천「야드」에 이르는 영국군여단 전선에서는 도처에서 육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벽녘에 영국군 좌측의 한국군이 적압력으로 후퇴하였고, 아침나절에는 중공군을 「글로세스터셔」연대 제1대대의 측면과 배후의 벼랑에 살도하였다.
대대보급소는 유린되고 여단본부와는 차단된 채 「글로세스터셔」제1대대 전면에도 중공군 1개 연대가 육박해 오고 있었다. 마침내 연대본부로부터 현재 대대가 달라붙어 있는 고지를 사수하라는 무전이 왔다. 제45포병대는 포신이 벌겋게 달도록 지원포격을 계속했다. 포마다 1천발 이상을 쏘아댔다.
그들은 한국에 가져온 영제포탄이 동이 날 때까지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때로는 1백「야드」전방에 접근해온 중공군 소총수에까지 포탄을 퍼붓기도 했다.
그들은 포를 지켰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어느 포병부대라도 더 이상 훌륭히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4월23일 저녁이 되자 고지에서 잠시도 싸움을 쉬지않던「글로세스터셔」연대는 보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절대 필요한 것은 탄약과 총과 약품이었다. 식량도 얼마간의 빵과 삶은 계란밖에는 남지 않았다.
미공군에서 보급품을 투하하려고 했지만 피아가 뒤섞여 혼전이 벌어지고 있어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기들은 모든 화력을 동원하여 중공군이 달라붙은 능선에 「네이팜」탄과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포병의 계속적인 포격과 미공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글로세스터셔」연대의 나머지 2개 대대 후방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구원부대 접근도 못해>
또한 「얼스터」대대와 「퓨질리어」대대도 연대본부와의 연락이 끊기고 여단본부 자체도 적의 소송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퓨질리어」대대에 배속된 보충대의 사병들은 영국으로부터 도착한 후 소속부대에 가보지도 못한 채 피습을 받아 사상자를 냈다. 23일 중일, 그리고 밤새도록 전투는 계속되었다. 「글로세스터셔」연대의 제1대대는 그들의 귀중한 고지를 계속 지키면서 몰려든 중공군공격을 격퇴했으나 24일 새벽부터 상황은 절망적으로 돼갔다. A중대는 적의 첫 파상공격으로 유린됐지만 B중대도 24일 새벽에는 장교 1명과 사병 15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적의 수류탄과 기관총탄이 쉴새없이 날아 들어오는 깊은 참호 속에서 나머지 병사들은 계속 버텼다. 총에 맞지 않고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6백22명 병력의 「글로세스터셔」연대 제1대대를 지휘하고 있는 「I·P·카네」중령은 예하 각 중대의 잔여병력을 자기 지휘소가 있는 능선으로 집결시켰다. 연대근무 26년의 경력을 가진 「카네」중령은 시종 침착하게 대대를 지휘했다. 중공군의 맹사에도 불구하고 각 중대는 대대장 지휘소에 집결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대대의 방어선은 4「마일」서 불과 수백「야드」로 줄어들었지만 대대지휘소는 아직도 지켜졌다. 여단본부와의 어려운 통신연락을 통하여 「카네」중령이 요청한 것은 부하 중상병들을 「헬리콥터」로 후송해달라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적의 포화가 치열하여 「헬리콥터」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본부에서는 능선을 통하여 보충병력을 보낼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바 불가능하다는 「카네」대대장의 회답이 곧 되돌아 왔다.
그러나 4월24일에 여단본부는 미군「탱크」지원 하에 「필리핀」군 1개 대대를 「글로세스터셔」연대 구출차 출동시켰다. 「필리핀」군부대는 「카네」중령지휘소로부터 2천「야드」점까지 접근했으나 앞서가던 미「탱크」가 적포격으로 주저앉아 길을 막는 바람에 전진이 정지됐고, 이어 치열한 적의 사격을 받자 후퇴하고 말았다. 그후에도 「필리핀」대대는 접근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영국「센튜리언·탱크」의 지원 하에 「벨기에」군대대와 「푸에르토리코」 보병들도 합세하여 진격했지만 능선과 계곡에서 수천명의 중공군과 부닥쳐 또 후퇴했다.

<15야드 거리 두고 사격>
이때 미 제3사단은 임진강 남쪽으로 후퇴하고 있었으나, 별로 적의 중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탱크」와 보병으로 영국군을 구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 제3사단은 「카네」중령대대 가까이 가볼 수도 없었다. 24일 저녁에 「글로세스터셔」부대와 다른 영국군부대와의 간격은 7「마일」로 벌어졌다. 적대군 속에 완전히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24일 밤에도 「카네」중령부대는 악착같이 고지로 기어오르는 중공군과 싸웠다. 그들 앞에는 벌써 수천명의 중공군이 즐비하게 죽어 쓰러졌다. 그러나 25일 새벽이 되자 「글로세스터셔」부대원 중 총을 들 수 있는 장병은 3백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탄약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장교들은 중공군이 15야드 앞까지 오기 전에는 쏘지 말라고 사병들에게 속삭였다.
◇주요일지(1951년5월20·21·22일)
※5월20일 ▲적3개 사단 한계∼풍암간의 아군전선 돌파▲미제2사, 적의 돌파구 봉쇄코 분전▲적의 오늘 하루피해 2만4천▲「리지웨이」장군, 전선시찰▲「모스크바」방송 공산군은 한국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보도
※5월21일 ▲적공세 쇠퇴기미▲미군 의정부에 재돌입▲「아먼드」미10군단장, 5일간의 적피해 4만8천이라고 발표▲이대통령, 동부전선시찰
※5월22일 ▲국군, 문산 돌입▲중공군 청평서 교두포 포기코 후퇴▲적기1위 문산 부근 아군폭격▲중공, 「유엔」의 대중공 금수안가결을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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