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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적의 춘계공격-최후의 결전(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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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51년 4월초, 50만 병력을 가진 「유엔」군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시 38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명장 「마쉬·B·리지웨이」장군의 출혈작전(Operation Killer)이 주효하여 오산∼장호원∼제천∼영월∼삼척선까지 남하했던 중공군과 북괴군은 막심한 피해를 받으며 북으로 밀리고 있었다. 「유엔」군은 4월3일에 서부에서 대거 38선을 돌파했고, 동부해안에서는 4윌4일에 국군이 간성에 진출하였다. 중부에서는 4윌5일에 춘천북방의 소양강을 도하로 계속 진격하여 4월18일에는 화천저수지를 점령했다.

<중공군, 한국전 끝장을 기도>
「유엔」군은 자신이 있었으나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러면서도 미8군이 밀고 올라갈 수 있는데 까지는 올라갈 작정이었다.
4월 중순, 화창한 봄이 한국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전화에 그을른 산야에도 새싹이 돋아 나오고 꽃이 피었다. 그러나 겨울눈 속에 쓰러져 죽었던 병사들의 해골은 눈이 녹으면서 언덕을 굴러내려 이제 막 활짝 피기 시작한 진달래와 개나리꽃 속에 묻혔다. 봄과 함께 한국전선을 찾은 것은 적에게 소생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적은 3월18일부터 「유엔」군과의 접촉을 의식적으로 끊고 이 동안에 북한에 75만 병력을 집결하여 춘계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북한상공을 정찰중인 미공군기는 매일 수백대, 때로는 1천대 이상의 적차량 이동을 목격하곤 했다. 중공군은 「유엔」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전세의 주도권도 아직 자기들이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이번 춘계대공세를 통하여 「유엔」군으로 하여금 1950년 겨울에 겪은 것과 같은 청천강과 장진호의 비극을 다시 맛보게 하면 한국전쟁은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한게 틀림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싱턴」은 4월에 들어 한국전쟁의 주역인 「맥아더」원수를 해임시키고『정책의 진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현지 전세여하에 따라서는 한국으로부터의 전면철수도 부득이 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국의 운명은 「워싱턴」이나 「유엔」이 아니라 현지의 싸움터에서 판가름이 나게 되었다.
적은 실제 공세개시의 타이밍도 교묘하게 맞추었다. 즉 그들의 1차 춘계공세는 4월22일부터 개시됐는데 이는 미8군의 출혈작전을 지휘하던 「리지웨이」장군이 「맥아더」후임으로 동경에 부임한지 꼭 10일만이었고 「밴플리트」중장이 미8군사령관으로 한국에 비래한지 불과 1주일만이었다. 모두가 4월11일의 「맥아더」해임 「쇼크」로부터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어리둥절할 때였고, 물론 「밴플리트」신임8군사령관은 휘하부대의 실태도 채 파악하지 못할 때였다.
어쨌든 1951년 4월과 5월에 한국전의 운명을 걸고 피아 1백20만의 대군이 1백70리 전선에서 두 차례에 걸쳐 격돌했다. 인해와 화력의 대결로 특징지은 한국전 최후의 이 결전에 참전했던 한 지휘관은 이 전투의 전체양상과 의의를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전 전선에 백20만 대군집결>
▲백선엽씨(당시 한국군 제1군단장=소장·예비역육군대장·전 육군참모총장·현 충비사장·51) <중공군이 미국과 「유엔」의 미묘한 움직임에 「타이밍」을 맞추어 51년4월과 5월에 전개한 대공세는 한마디로 한국전의 최종결전이었지요. 물론, 휴전회담이 시작되고부터도 철의 삼각지를 중심으로 백마고지·저격병능선·피의 능선·단장의 능선 등 치열한 고지쟁탈전투가 있었지만 피아가 1백여만 이상의 병력으로 전 전선에서 부딪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중공군이 이 공세에 모든 것을 걸고 판가름을 하려고 한 게 확실해요. 물론 주력은 60여만의 중공군이고 북괴군은 7개 사단으로 전력이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어요. 중공군은 기습적인 인해전술로 아군전선을 돌파하려고 했고 사실 일시 몇 군데는 뚫리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인해전술을 쓴 병력이 많은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전술적으로 볼 때 보급문제 때문이었어요. 기동력이 열세한 보통 4∼5일간의 전투를 위해 1주일이상 보급준비를 했어야 해요.
그러니까 한번 공세를 취하고 4∼5일만 지나면, 다시 더 못 대들어요. 이점은 4월이나 5월공세 때 적이 처음에는 아주 사나운 기세로 대들었지만, 며칠 후에는 기진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적의 춘계공세는 이 같은 자기들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 보급이 지탱하는 동안 단숨에 인해로 아군전선을 유린하려는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속전속결로 결전을 시도한 거예요. 적의 이 같은 인해돌격을 저지한 것은 「유엔」군이 잘 대항한 것과 아울러 역시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아군화력 덕분이었지요.
인해와 화력의 대결에서 후자가 승리했다고 보겠습니다. 「유엔」군은 지상포·공군·함포 등 삼위일체의 화력으로 적의 인해를 뒤덮었어요. 이 화력의 최대한의 이용은 그때 부임한지 얼마 안된 「밴플리트」장군의 공이 컸지요. 적의 춘계공세 실패 후에 나타난 현상이 6월23일 「유엔」에서의 「말리크」소련대표의 휴전회담제의지요.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력으로 남한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적의 춘계공세실패는 한국전의 휴전을 가져왔다고 하겠지요.>

<「밴플리트」외아들 실종되고>
한편 「제임즈·A·밴플리트」장군은 어떤 심경으로 적의 춘계공세에 대처했는가를 살펴보겠다. 「아이크」의 육사동기며, 2차대전 후 「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장으로 공산「게릴라」소탕에 큰공을 세운 「밴플리트」중장(당시계급)은 철두철미한 반공적인 직업군인이었다. 정치성은 전혀 고려치 않고 오직 전투에만 골몰하는 그런 군인이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맥아더」해임 후 「워싱턴」의 대한정책이 유동적인 이때에 8군사령관으로 이런 장군을 맞이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장군의 외아들 「밴리트」공군중위도 B-26경폭격기를 몰고 북한에 출격 중 실종되었다. 「밴플리트」장군의 기자회견이나 그 밖의 관계자료에 수록된 기록을 보면, 장군은 처음부터 자신을 갖고 중공군과 대전했다는 것이 나타나있다.

<내가 8군사령관임명을 받은 것은 4월11일이었고, 대구에 날아온 4월14일 낮12시였다. 동경으로 부임하는 「리지웨이」장군으로부터 8군사령관직을 인계 이날 하오5시였다. 8군은 한국에서 몇 번 타격을 받고 있었으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격을 전개해야 했다.
그러나 적은 막대한 병력으로 대공세를 취하여 8군을 바다로 몰아넣으려고 하고있었다.
그들은 자신만만했고 대담하게도 자기들의 기도를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적은 방송을 통하여 「유엔」군을 물리치고 서울을 다시 빼앗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상대방을 공포에 빠지게 하려는 이런 전법은 「줄리어스·시저」시대의 낡은 것이지만, 동양에서는 미신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동양사람들이 체면을 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허세도 무의미한 것은 아닌 것이다. 중공군의 새 병력이 매일같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서울북방에 주저항선 설치>
8군사령부의 장교들은 서울을 방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후퇴한 후에 새 진지를 어디다 정할 것이냐를 토의하고, 또한 이에 대한 내 의견을 묻는 것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령부의 이런 공기와는 달리 일선의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즉 8군 장병의 사기는 왕성했고, 투지가 만만하였다. 나는 세계1차와 2차 대전, 그리고 「그리스」에서 군대와 함께 보낸 경험으로 잘 알고 있거니와 휘하장병들을 접해보면, 군대사기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지프」를 타고 군대장비를 시찰하면서 여기저기 멈추어 사병들과 한 두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 그 군대가 전투에서 얼마나 잘 싸울 수 있는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8군 장병을 시찰할 때 그들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나는 어느 곳에 가서 『야! 사병』하고 소리치면 저쪽에서 싱긋 웃으며 경례를 하고 『장군님』하고 되받는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방심치 않고 잘 훈련되어있으며 친밀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느 하사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진격하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있는 것입니까』하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의지가 굳세고 용기가 용솟음치고있는 젊은 소대장들도 곧잘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만하면 적과 싸워 이길만 하다는 자신을 갖게되었다.
이래서 나는 서울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이 고도를 적에게 세 번째로 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70여만의 적대군이 공세로 나올 때 아군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할 경우도 있겠지만 여하간 나는 서울북방에 우리의 주저항선을 치기로 하였다.> 「밴플리트」장군의 서울사수결의는 적의 공세가 개시되기 3일 전인 4월19일에 한국종군기자에게도 전달되어 각지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었다.

<중앙청 안에도 포열 갖춰>
이 보도로 의기소침했던 온 국민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행운의 특종을 취재한 기자는 당시 합동통신의 장명덕씨로서 그는 포천일선서 우연히 「밴플리트」와 부닥쳐 즉석회견에서 이 같은 중대「뉴스」를 얻었던 것이다. 「유엔」군의 주저항선이 서울북방에 설정되자, 일단 영등포 안양으로 후퇴했던 포병들도 속속 북상하였다. 심지어 중앙청 안에도 155m포의 포열이 쳐져 거대한 포신들이 북녘하늘을 겨누었다. 이제 「유엔」군의 결전태세는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주요일지(1951년5월17·18·19일)
※5월17일 ▲인제·춘천간에서 격전 전개▲적, 인제 남방의 돌파구로 대거침투▲「트루먼」, 「맥아더」해임은 정당하다고 언명
※5월18일 ▲아군, 전선에서 후퇴완료▲적, 의정부에 침입▲「밴플리트」, 적의 2차 공세 실패예언▲김성수 부통령, 국회서 취임인사▲조방사건 군재개정▲「유엔」총회 대중공 금수안 47대0 기권8로 가결
※5월19일 ▲미 제2사단, 적 포위망 돌파▲적 공세 점차 약화▲전「유엔」군, 38선 이북진지서 철수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l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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