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4) 고요한 성탄을|임형빈 <중앙여고 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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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크리스머스가 되고, 「캐럴」이 울려올 때면 나는 우울하다. 내가 공부하러 미국에 가서 3개월만에 첫 크리스머스를 맞이하여 「뉴요크」에서 누이를 만나기 위하여 약 20시간의 버스 여행길에 올랐었다. 마침 첫 학기말 시험을 치른 피로한 몸을 이끌고 간 「뉴요크」행 초행길은 어찌나 멀고 신경이 쓰였는지 모른다. 「디젤」기름냄새, 옆에서 피워대는 엽연초의 역겨운 냄새, 피곤한 몸에는 타향살이의 고달픔과 향수가 엄습했다. 두 세시간마다 정차할 때면 들리는 것은 「크리스머스·캐럴」, 달리는 차창에 보이는 것은 집집마다 창가에 장식해 놓은 「크리스머스·트리」의 장식이었다. 두번째 세번째의 「크리스머스」때도 같은 느낌의 행차였다. 나에게 「크리스머스」란 고달픈 것이라는 인상이 제2의 천성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 그 때문이었다. 도대체 선진국의 「크리스머스」란 나그네에게는, 한산한 것이었다. 그만큼 가정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광란의 「크리스머스·이브」가 근년에 와서 비교적 조용히 지내는 경향으로 바뀐 것은 퍽 다행스럽다. 성탄절이 우리 나라에서 공휴일로 제정된 것의 타당성 여부는 논외로 하고라도, 연말에 가까운 공휴일을 많은 전설과 여러 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에 따라 즐겨보려는 젊은이의 낭만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 계절에 많은 낭만이 꽃피고 온고지신의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자기분수에 맞게 행하는 것이 성탄절의 참뜻이다.
경찰관과 중·고등학교 교사들까지 야간 가두 동원되어 선도 (단속?)에 나서게 하는 일이 없는 고요한 성탄절이 이 땅에도 하루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 원래 성탄절의 행사는 일몰 후에 이루어진다. 낮이 활동과 직장의 시간이라면, 밤은 휴식과 가정의 시간일 것이다. 성탄절 행사는 가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우리 주변에, 앞서 말한 나의 경험과 같은 처지에 있는 친지나 이웃은 없는가 살펴볼 따뜻한 마음을 가져보자. 가난한 사람, 불행한 이웃, 무엇인가 이웃의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서로 나누고 그들의 동결된 마음에 따스한 손길을 뻗쳐주는 그러한 마음씨가 더욱 아쉬워지는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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