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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정권 수립 도운 고려인들 그들을 기다린 건 숙청의 칼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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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26면

저자: 김국후 출판사: 한울아카데미 가격: 2만8000원

‘허가이’ 혹은 ‘고가이’라는 말에는 러시아 이주 한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姓)이 뭐냐는 러시아 공무원의 질문에 “허가입니다” “고가입니다”고 대답한 사람들은 원래 한국 성인 허나 고가 아닌 허가이 혹은 고가이로 살아야 했다.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

조선인이 러시아에 처음 정착한 것은 철종 14년인 1863년. 함경북도 농민 13가구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우수리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이래 국경을 넘은 수많은 한인들은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버려진 땅을 옥토로 만들었다. ‘카레이스키(고려인)가 가는 곳에는 바위 위에도 풀이 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1937년 9월 18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하루아침에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내동댕이쳐진다. 축사에서 눈을 붙이고 추위와 굶주림과 싸워가며 악착같이 살아남은 사람 중에 명민한 이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공산당 청년동맹·관공서·콜호스(집단농장)· 각급 학교의 간부가 되어 사회 지도층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북한을 통치하게 된 소련의 스탈린 정권이 똑똑한 카레이스키를 뽑아 자신의 귀와 입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46년부터 54년까지 소련에서 평양으로 파견된 경험 많고 재주 있는 카레이스키는 약 500명. 이들은 북한의 소비에트화와 김일성 정권 창출에 매진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망(1953년 3월 5일)으로 소련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6·25를 통해 중공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한 김일성은 이들 ‘소련파’ 숙청에 나선다.

이 책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평양으로 삶의 터전을 강제 당하는 것도 모자라 배신자로 몰리는 비운의 삶을 살았던 카레이스키들에 초점을 맞췄다. 저자는 1990년대 초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며 카레이스키 육성 취재와 비밀 자료 입수를 통해 북한 정권 창출 비화를 추적해온 언론인이다.

그가 가장 주목한 사람은 ‘소련파’ 총수로 불렸던 허가이다. 허가이. 러시아 이름은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허가이. 1908년 하바롭스크에서 출생한 그는 세 살 때 부모를 잃고 삼촌 집에서 자라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고위간부로 일하다 45년 소련군에 동원돼 평양 주둔 소련군 제 25군 정치부에 파견됐다. 그리고 연안파 지도자였던 한글학자 김두봉으로부터 46년 가이(哥而)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는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서 익힌 경험과 실무 능력을 발휘, 당 사업 체계화 및 정부 제도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소련의 힘을 업고 김일성 수령 만들기의 산파역을 맡았다. ‘당 박사’로 불리며 김일성에 이어 서열 2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끝없는 견제와 비판에 시달리다가 53년 7월 1일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된다. 이를 두고 ‘의문의 자살’이라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후 본격화된 ‘소련파’ 숙청은 62년 마지막 남아 있던 카레이스키의 소련 귀환을 끝으로 일단락된다.

저자는 “올해는 고려인 1세대가 대륙의 한민족 개척사를 쓰기 시작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라며 “이 책이 카레이스키의 ‘슬픈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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