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계곡’과 ‘다윈의 바다’ 넘을 토대 마련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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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05면

6일 찾아간 경북 경산의 일심글로발 본사는 텅 비어 있었다. 차세대 세계 일류상품으로 선정된 유리창 청소 로봇을 만드는 생산라인에는 부품만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경산=염태정 기자

벤처업계엔 ‘데스 밸리(Death valley·죽음의 계곡)와 다윈의 바다(Darwinian sea)를 건너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죽음의 계곡’은 생명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미국 네바다주의 황량한 땅으로 아이디어에서 기술개발, 제품 양산까지의 험난한 길을 일컫는 말이다. ‘다윈의 바다’는 악어·해파리 떼가 가득해 일반인 접근이 어려운 호주 북부 해변으로 신제품 양산에 성공하더라도 시장에서 다른 제품과 경쟁하며 이익을 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세계 최초로 유리창 청소 로봇을 개발한 일심글로발의 류만현 대표는 ‘죽음의 계곡’ ‘다윈의 바다’를 건너지 못해 지금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상당수 벤처기업도 두 장벽을 넘지 못한 채 좌절한다.

벤처 생태계 활성화하려면

죽음의 계곡과 다윈의 바다를 건너는 데 필요한 건 무엇보다 돈이다. 전문가들은 벤처기업이 두 장벽을 넘기 위해선 벤처기업의 자금조달 통로가 ‘론(loan·대출)’에서 ‘인베스트먼트(investment·투자)’로 바뀌어야 하고, 이를 위한 투자·이익 회수의 선순환 시스템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창업 3년 이내의 초기단계 기업투자가 늘어야 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에인절 투자자(angel investor)가 더 나와야 하며 ▶벤처기업의 투자 젖줄이 될 수 있는 전용 주식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벤처 성공을 위해선 기업인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토대는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장흥순 서강미래기술연구원장은 “벤처투자는 가족(Family)·친구(Friend)·바보(Foolish)의 3F만 한다는 얘기가 있다”며 “아직 기술평가 능력이 부족한 데다 벤처캐피털·에인절 투자가 미흡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자금이 절실한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매우 부족해 대부분이 빚을 내서 사업을 한다”며 “벤처캐피털의 보수적 투자 행태도 문제”이라고 지적했다. 류 대표가 “벤처캐피털에 ‘벤처’는 없고 캐피털만 있었다”고 탄식하는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업계에 따르면 창업 후기단계라 할 수 있는 창업 7년 초과 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투자는 2007년 25.1%에서 2012년 46.3%로 늘었지만 3년 이내 창업 초기단계 투자는 같은 기간 36.8%에서 30%로 줄었다.

이에 대해 김형수 벤처캐피탈협회 전무는 “투자자에게 연 6~8%의 수익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에서 시장성이 불확실한 초기 벤처기업 투자를 더 늘리긴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위험성이 매우 큰 초기 벤처 투자는 사실 에인절 투자자가 맡아줘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인절 투자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국내 에인절 투자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긴 힘들지만 업계에선 지난해 300억원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열악한 상황이다. 지난해 9월 ‘한국엔젤투자협회’가 출범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투자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에인절 투자를 늘리기 위해 투자금 세액공제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관련 세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상태다. 정부는 5월 세제지원 강화·정책자금 공급확대 등을 골자로 한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을 내놨고, 9월엔 ‘벤처산업활성화를 위한 규제개선 추진방안’을 발표했지만 현장에선 아직 효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연 매출 10억원 규모의 기상 관련 소프트웨어(SW)를 개발하는 벤처기업 S사 대표는 “사업확장을 위해 투자를 받고 싶지만 투자유치는 하늘의 별 따기”라며 “앞으로 여건이 나아질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의 투자 젖줄이 될 수 있는 프리보드와 코넥스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넥스는 코스닥 상장요건을 갖추지 못한 기업을 위해 올해 7월 한국거래소 내에 문을 연 제3의 주식 거래시장이다. 보다 작은 기업을 대상으로 금융투자협회가 운영하는 장외 주식시장인 프리보드는 2000년 ‘제3시장’이란 이름으로 출범해 2005년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두 시장 모두 개점 휴업 상태다.

프리보드기업협회 송승한(쏜다넷 대표) 회장은 “현재 50여 개에 불과한 프리보드 상장업체가 최소 300개는 돼야 거래가 제대로 이뤄진다”며 “프리보드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선 감사보고서 마련과 컨설팅 등에 2000만~30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를 지원해주고 주식양도차익 비과세 등을 비롯한 지원책도 마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우려하는 투자자 보호는 공동 감사제도를 두면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영주 (민주통합당)의원은 올해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서 “코넥스 상장기업이 26개, 하루 거래대금이 6억원에 불과하다”며 “거래기업이 적은 데다 관련 기업 정보도 부족해 일반투자자의 외면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투자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벤처기업협회 남민우(다산네트웍스 대표) 회장은 “정부가 내놓는 벤처 활성화 정책은 방향은 맞지만 현장에서 그 효과를 느끼기까진 꽤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실제 집행 속도를 높여야 한다”며 “벤처기업인들도 지원에 의존하기보단 스스로 기술개발과 시장확보·마케팅 능력 향상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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