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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김일성에 버림받은 '소련파' … 그들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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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
김국후 지음, 한울
320쪽, 2만8000원

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옛 소련 연방 지역에 거주하는 한민족 동포를 고려인, 혹은 러시아어로 카레이스키라 부른다. 그들이 러시아 극동의 연해주로 처음 이주한 지 150주년을 맞았다.

 1863년(철종 14) 조선의 농민 13가구가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옮겨간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들의 150년 이주사에서 1945년 이후 몇 해 동안 벌어진 사건을 집중 조명한다.

 카레이스키에겐 ‘슬픈 역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연해주에 살던 카레이스키들이 중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흩어진 것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 때문이었다. 말이 이주정책이지 참혹한 강제추방이었다. 이 책은 카레이스키의 슬픈 역사가 그때 한 번뿐이 아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30여년의 기자생활 동안 20년 넘게 북한과 러시아의 현대사 관련 취재 현장을 누빈 저널리스트이다. 90년대부터 카레이스키들을 인터뷰하고 북한·러시아 등의 각종 자료를 연구해온 경력을 토대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비사(秘史)를 되살려냈다.

 카레이스키의 또 다른 비극은 평양에서 벌어졌다.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 갈대밭에 내던져졌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생존한 카레이스키들을 스탈린이 다시 동원했다. 1945년 8월 중순의 일이다. 그 해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한 스탈린은 빠른 속도로 한반도 북쪽을 점령해 들어갔다. 8월 29일 소련군정 사령부를 평양에 세웠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북한을 직접 통치하기는 어려웠다.

 저자에 따르면, 8월 중순부터 스탈린은 중앙아시아 카레이스키 가운데 대졸 출신의 엘리트 500명을 각 분야별로 선발해 북한에 급파했다. 이들은 소련군정 사령부의 통역을 맡으며 북한인들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

 일명 ‘소련파’로 불린 이들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촉진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30대의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는 과정의 ‘숨은 공신’이 그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남로당 출신 박헌영이 숙청되듯이 소련파 또한 김일성에 의해 버림받는다. 소련파 거두인 허가이의 죽음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저자는 허가이의 자살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탈린 사망 이후 김일성은 중국 쪽에 가까이 가기 위해 북한 체제의 탈스탈린화를 진행하는데 이때 소련파를 희생양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500명 카레이스키 가운데 450명은 추방되듯이 북한을 떠나며 나머지 50명은 권력암투 과정에 노동수용소에 갇히거나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오늘날 카레이스키는 5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카레이스키의 운명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설 곳은 과연 어디인지를 되묻게 하는 책이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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