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패션에 담긴 건 옆집 언니가 입을 것 같은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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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웨이트(43)는 국내엔 덜 알려진 패션 디자이너다. 하지만 세계 패션계로 무대를 옮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프랑스 브랜드 ‘끌로에’를 책임지고 있다. 요즘 패션계를 쥐락펴락 하는 디자이너들이 그처럼 끌로에를 거쳐갔다. 샤넬과 펜디의 디자인을 맡고 있는 칼 라거펠트(80)는 33세이던 1966년부터 22년간 끌로에를 이끌었다. 이후 마틴 싯봉, 스텔라 매카트니, 피비 필로 등 내로라하는 디자이너가 끌로에를 대표했다. 2011년 5월 끌로에 창조부문 총괄 디자이너로 영입된 웨이트는 이때를 기점으로 더욱 주목받는 패션 디자이너로 부상했다. 끌로에가 지난달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명품 거리’에 단독 매장을 열었다. 한국에선 처음이다. 웨이트를 e메일로 만났다. 세 아이의 엄마로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여성, 가장 자신답게 사는 여성들을 위한 옷을 만든다”는 그의 패션 세계를 들여다 봤다.

클레어 웨이트는 세계 패션계에 몇 안 되는 여성 톱디자이너다. 흔히 여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패션 디자인 세계에서 유명 브랜드의 창조부문 총괄 책임자 대부분은 남성이 맡고 있다. 웨이트의 존재가 흥미로운 건 또 있다. 영국 출신으로 프랑스 대표 브랜드를 이끈다는 점이다.

브랜드의 이력도 독특하다. 끌로에는 유대계 이집트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인 가비 아굥(92)이 52년 파리에서 시작한 브랜드. 50년대 프랑스는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창안한 ‘뉴 룩’이 지배하던 때였다. 잘록한 허리선, 풍성하게 퍼지는 치마가 상징인 여성적이고 우아한 패션의 시대였다. 잘 차려 입은 귀부인들이 수차례 살롱에 들러 몇 달씩 가봉해야 우아한 옷 한 벌을 가질 수 있는 때였다.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 아굥은 자신의 상황을 반영하듯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여성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끌로에를 통해 펼쳤다. 디자인부터 기존 패션 관습과 다른 형태를 취했다. 쭉 뻗은 자연스러운 실루엣의 바지와 여기에 어울리는 편안한 모양새의 블라우스, 재킷, 외투 등이 끌로에를 대표했다. 아굥은 맞춤복 중심이던 당시 패션 세계에 ‘프레타포르테’, 즉 기성복을 적극 도입한 인물로 불린다. 이후 세계 패션계는 끌로에라는 브랜드를 ‘파리 여성의 감성을 담은 옷’이라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60주년을 맞은 끌로에가 웨이트와 만난 지 3년째. 클레어 웨이트는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 여성이 입는 옷을 만든다”고 자신의 작업을 정의했다. 자신보다 먼저 끌로에를 책임졌던 디자이너들은 재클린 케네디, 브리지트 바르도, 그레이스 켈리, 마리아 칼라스 등 그 시대 대표 아이콘들과 함께 명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웨이트는 “끌로에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유명인과 더불어 강화되던 시대는 지났다”고 진단했다. “알려지지 않은, 현실적인 여성이 요즘 끌로에의 아이콘이다. 요즘 여성들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정의되는 어떤 ‘룩(look)’을 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패션은 내가 입고 싶은 스타일로 진화했다. 예전 디자이너들에게 아이콘이 있었다면, 내 아이콘은 오늘을 사는 현대 여성이다. 난 이번 시즌 그들의 옷장에 걸리게 될 바로 그 옷을 만든다.”

웨이트는 “이웃집 언니가 입을 것 같은 옷이 끌로에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세상이 하나로 좁혀지고 있다. 영국이든 프랑스든, 차이는 점점 더 옅어지고 여성들이 원하는 건 그저 현대적인 스타일일 뿐이다. 물론 현대적인 스타일이라 통틀어 말한 대도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안목은 제각각이지만.” 웨이트의 말은 브랜드의 정체성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아굥 여사가 끌로에를 시작한 것을 두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여성이 만드는 진짜 여성 패션이 시작됐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아굥 여사는 ‘난 내가 원했던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 말이 참 좋다. 그런 뜻이 끌로에를 거쳐간 쟁쟁한 디자이너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게 지난 수십 년간 끌로에 스타일을 현실적인 동시에 아름답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나 역시 그런 옷을 만들고자 한다.”

웨이트는 끌로에로 직장을 옮기기 전 여러 유명 브랜드에서 일했다.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니트를 전공한 그는 미국 브랜드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을 거쳐 이탈리아 브랜드 ‘구찌’에서 유명 디자이너 톰 포드와 함께 했다. 끌로에 영입 직전에는 162년 전통의 영국 스코틀랜드 브랜드 ‘프링글’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프링글’ 근무에 대해 “웨이트가 유서 깊지만 잊혀질 뻔했던 브랜드를 세계 명품계 중심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고 평가했다.

웨이트는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내년 봄·여름용 패션쇼에서 푸른색 의상을 대거 선보였다. 40여 벌의 의상 중 절반 정도가 푸른색 드레스, 재킷, 치마 등으로 채워졌다. “블루는 어떤 빛깔을 써도, 어떤 형태의 옷에도 잘 어울리는 색이다. 검정처럼 너무 세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약하지도 않은, 매력적인 색상이다. 디자인은 간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웨이트는 자신의 장기인 니트 기법을 응용한 드레스도 여러 벌 선보였다. “니트 기법으로 만들면 자칫 할머니 옷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몸에 척 붙지 않고 툭 떨어지는 모양새로 디자인해 그걸 방지했다. 폴리에스터를 섞어 이런 효과를 냈다.”

열 살짜리 쌍둥이 딸, 두살배기 아들을 둔 웨이트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긴 하다”며 “그래도 영국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살고 일하는 행복감이 더 크다”고 했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 엄마는 아이들을 어떻게 꾸밀까. “아이들은 꾸미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어린 시절을 즐기는 데 집중해야지 꾸미는 것에 빠져선 곤란하다. 특히 여자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내면을 채우기 보다 자신의 이미지에만 치중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강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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