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제자는 필자>|<제21화>미·소 공동 위원회 (15)|문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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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차 공위 개막>
1차 공위가 깨진 뒤 미 주둔 군사령관 「하지」장군과 소련 주둔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사이에는 공위를 다시 열자는 서신이 여러번 오갔다. 그러나 공위는 두 현지 주둔군 사령관 사이의 교섭으로써는 그저 『의견을 같이한다』는 말만 되풀이 됐을 뿐 진전이 없어서 결국 한국 문제는 미·소 외상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좌우 합작·10월 폭동·좌우 합작 붕괴 등으로 어수선한 46년을 보내고 47년4월8일에야 비로소 공위가 다시 열리는 실마리가 트인 것이었다.
1년이 지나가는 동안 미군 대표 「아널드」는 본국으로 가고 「브라운」이 후임으로 왔으며 (9월23일) 소련군은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로코코프」와 경질되었었다.
공위 재개의 실마리는 당시의 미 국무장관이던 「마셜」이 소련 외상 「몰로토프」에게 『조선 문제 해결을 위해 공위를 재개하며 의사 발표의 자유에 대한 민주적 권리를 존중하는 원칙 하에서 공위 사업을 촉진시키는데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공위 재개 일자를 정하자는 서한에서 마련되었다.
4월8일에 보낸 이 서한에 대한 「몰로토프」의 회신은 4월22일에 「마셜」국무장관이 받았는데 『5월20일 서울에서 공위를 재개하자』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공위는 이제 미·소 양대국의 흥정판이 된 것이다.
이 서신이 교환 된 다음날 26일에 「마셜」 국무장관은 비로소 「하지」장군에게 공위 재개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날 서울에서는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 기념 축하 대회가 열려 잔칫날 기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셜」의 공위 재개 훈령이 내린 것은 5월14일이었다. 소련군에서도 이날 훈령이 내렸고 16일에는 공위에 참가할 소련 대표의 선견대가 1차 때와 같이 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한 것이었다.
소련 대표 선견대가 서울에 오자 「하지」장군은 행정 명령 제3호를 내렸다.
이 명령은 공위가 열리는 동안에는 일체의 정치적 집회를 금하는 것이었다. 「하지」는 이를 어기면 엄중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날자로 「민청」이 해산되었다.
미 군정청 측은 공위 재개를 맞아서 국내 정치인들에게 크게 신경을 썼다. 그래서 「브라운」 소장은 5월18일에는 덕수궁에서 이승만 김구 김성수 조소앙 백남훈 조완구 장덕수 서상일씨를 초청, 공위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21일에 열린 2차 공위는 양측 대표들이 크게 바뀌었으나 절차는 1차 때와 똑같았다.
미국 측은 「브라운」 수석 대표를 비롯, 「웨크린」준장 「번즈」 (국무성 대표) 「조이너」 (육군성 대표) 「링컨」대령 「랭돈」「크라이드·서전트」였고 소련 측은 「스티코프」 수석 대표 「툰킨」 (외무성) 「레베테프」「발라사노프」「코루크렌코」「크란드소프」「크루데예프」「키치슈니코프」등이었다.
회담 4일 만인 26일 공위는 제1차 공동 성명을 냈는데 이것은 1차 공위에 연달아 9호 성명으로 나왔다.
여기서는 의제를 임시 정부 수립 준비 안에 국한할 것과 의사 진행 방법, 서기국과 분과위원회의 설치 등을 다루었지만 난항이었다.
첫 회의서는 2개 분과 위원회를 두는데 합의했는데 제1분과 위원회는 ①임시 정부의 형태, 조직과 구조 ②정부 운영의 기초가 될 임시 헌장의 기초 ③임시 정부의 정강 기초를 다루고 제2분과 위원회는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 단체와의 혐의에 관한 문제를 다루기로 한 것이었다.
제1분위는 「번즈」 (미) 「툰킨」 (소련)이 공동 위원장이고 제2분위는 「웨크린」(미)과「발라사노프」(소련)였다.
이 2개 분과 위원회는 매일 하오 1시부터 회의에 들어갔으며 공위 진행의 내용을 국민에게 자세히 알리기 위해 매주 1회씩 공동 성명을 내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말은 공수표였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제1분과 위원회에서 쌍방은 합의점을 찾지 못해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하다가 결국 1주일만인 28일에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러니 제2분과 위원회가 진행될 리 없는 것이었다.
이때는 소련이 동「유럽」을 적화시켜 팽창 정책을 쓰고 있던 때로 「아시아」에서는 북한을 적화시키려는 야욕을 구체화할 때니 회의가 진전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6월1일에 제2분과 위원회에서 회담에 진전이 있었다고 발표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공동 성명 10호로 나온 이 「합의」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협의 대상 문제와 정강 헌장에 대한 질문서 작성』에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남·북 조선에 있는 민주 정당·사회 단체는 공위와의 협의에 참가하기 위해 3상회의 지지서에 서명하여 6월23일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서약·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위는 이 단체들을 초청. 서울에서는 6월25일에, 평양에서는 6월30일에 각각 합동 회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래서 「브라운」은 북한에 있는 정당 사회 단체 대표들을 만나보기 위해 6월29일 평양을 방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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