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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제자는 필자>|<제21화>미·소 공동 위원회 (13)|문제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좌우 합작 태동>
공위가 깨지기 한달전인 4월6일에 「샌프란시스코」의 방송에서 미군 정청에서 미·소 공위와는 상관없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려한다고 보도한바 있었다.
물론 이때까지는 공위를 성공시키려고 애쓰고 있던 때이니 만큼 「워싱턴」과 서울의 미군은 즉시 이 보도를 부인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 미군 정청은 공위가 난항에 부딪치고 있는 점등 여건에 비추어서 우익과 좌익을 한데 묶어 연립 정부 형식의 조선 임시 정부를 만들어보려고 구상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좌우 합작이다. 미군 정청, 즉「하지」장군은 좌우 합작을 하는 경우에는 극우파 극좌파를 다같이 피하고 온건 우파와 온건 좌파를 합작시키려고 구상했고 김규식을 중심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의 판단으로는 좌우 합작이 이루어진다면 남쪽의 정치 세력이 소련군 점령하의 북쪽 정치 세력보다 우위에 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 좌우 합작을 주선하고 노력한 인물이 바로 「하지」 장군의 정치 고문이던 「버치」중위다. 「버치」의 경력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한 미군 가운데 있던 일단의 청년 장교 「클럽」의 중심으로 정치 장교였고, 그는 정치 고문이던 「굿펠로」 대령의 후임이었다.
이 「클럽」에는 「필립·로」「로빈슨」 대위 등이 있었는데 「필립·로」는 6·25 뒤 아시아재단 대표로 우리 나라에 왔다가 한국서 사망한 사람이다.
「로빈슨」대위는 귀국 후 「하버드」대학에서 「터키」사의 교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어쨌든 「버치」는 장충 체육관 뒤의 큰 일본 집을 징발해서 쓰고 있었고 여기서 한국의 좌우익 정객들과 만나면서 좌우 합작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희에서도 말했지만 미군으로서는 당시의 종전 처리 방안이 확정되지 않았던 탓으로 「비키」는 「하지」를 움직여 좌우 합작을 시도해 보았을 뿐 「워싱턴」정부나 CIA등 상부 기관에서의 「미션」은 없었던 것 같다.
좌우 합작을 위한 첫 모임은 5월25일 「버치」중위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우파를 대표해서는 김규식 원세훈의 두 사람, 좌파에서는 여운형·황진남의 두사람이었다. 원세훈은 뒷날 「우리 일을 걱정하는 어떤 외국인의 알선」으로 만났다고 말했는데 「버치」의 중개였다.
김규식은 첫 모임에서 『완전 독립을 요구하고 노력하자면 합작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 합작 조건이다』고 제안했고 좌파는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버치」가 중간에서 뛰어 6월31일에는 원세훈과 허헌이 만났고 6월14일에는 김규식 여운형 허헌 「버치」가 만났다. 「하지」장군은 6월30일에 좌우 합작을 논의하고 있다는 성명서를 냈다.
「하지」장군은 『나는 벌써부터 조선 민중이 점차 정치 논쟁과 당파 힐책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줄 알고 있다.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면 조선 민중은 지도자들간에 충분한 협동이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김규식·여운형 양씨가 정당간의 불화목을 일소하고 조선 민중이 한결같이 동경하며 필요로 하고 또한 정당 지도자에게 보강을 받아야 할 친화를 초래함에 성공하리라고 믿는다』라고 간곡히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6월3일 전국을 순회 연설 중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워야겠다』고 발언했던 이승만도 이「하지」의 성명이 있은 다음날인 7월l일 담화를 내어 합작을 지지한 것이었다.
『내가 이때 공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김구와 내가 이에 협의하고 김규식과 여운형이 협의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언명하였다. 여운형의 협조를 얻으면 민족 통일이 좌익파까지 포함되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고 이승만은 말했다.
이승만이나 우익 진영에서도 공위가 깨지고 정당이 난입, 분열하는 그때로서는 좌우 합작은 하나의 기대였던 것이다. 좌우 합작은 예산보다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7월10일에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개인적 접촉에서 한 걸음 나아가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되고 대표단과 비서국이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우익 대표는 김규식 김붕준 최동오 원세훈의 4명이었고 좌익 대표는 여운형 허헌 정노식 이강국 성주식의 다섯이었다.
비서국은 우익 비서에 김진동 (영문) 송남헌 (국문)이었고 좌익 비서는 황진남 (영문) 김세용 (국문) 이었다.
합작 위원회는 발족했지만 우측은 반탁, 좌측은 찬탁의 기본 주장이 대립되는 가운데 7월22일 제1차 예비 회담을 덕수궁 공위 회의실에서 가졌다.
그러나 예비 회담이 열리기 5일전인 17일 조선 공산당이 갑자기 우익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성명을 내놓아 합작의 앞날에 찬물을 끼얹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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