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국민방위군 사건>(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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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교육대의 참상>(2)
국민방위군은 대체로 군 현역에 준하여 편성됐었다. 사령부 아래 교육연대가 전국에 51개소 설치되어 17세로부터 40세까지의 50만 장정을 수용했다.
본부사령부의 및 간부와 일부 교육연대장, 그리고 극소수의 기간 요원만 현역이고 나머지 지휘관은 모두가 주로 청년단 출신의 급조 방위군장교로 충당되었다.
방위군에 그런 큰 부정사건이 생긴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군 경험이 전혀 없는 방위 간부장교의 자질부족 때문이었다고 지적되고 있다.
그럼 다시 방위군의 참상을 관계자들로부터 들어보겠다.

<밥 훔쳐 오는 요령 가르쳐>
▲임쾌산씨(당시방위군 김해 교육대 훈병·현 부산동래 거주·사업·40) <나는51년1월20일에 방위군 김해 교육대에 들어갔는데 피복이나 침구도 안주고 겨우 2명에게 가마니 한 장씩을 주면서 깔고 자라는 거예요. 밥은 동네 민가에 가서 얻어먹으라는 거구요.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쌀이나 밥을 잘 주었는데 날이 갈수록 민심이 싸늘해 갑디다. 수십 명의 훈병들이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임금부락으로 동냥을 나가니 주민들도 못 견디게 됐지요 소대장들은 군사훈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밥 얻어 오는 요령을 습득 시켰어요.
아침 식사시간에 맞추어 찾아가 뗄 나무를 얻으러 왔다고 하면서 슬슬 눈치를 살피다 밥을 슬쩍해 가지고 튀라는 식의 요령입니다. 나중에는 주민들이 밥상을 차려놓고 먹다가도 우리가 나타나면 밥상을 다락에 넣고 피해 버리더군요.
몇 달씩 이발이나 목욕을 못하니까 자연히 몸에서는 악취가 풍겨 주민들은 우리가 옆에만 가도 코를 막고 도망치기도 했어요. 2월 중순부터는 매일 10여명이 굶어 죽었어요. 학식이 있고 좀 똘똘한 훈병들은 밥을 얻으러 나갔다가 그대로 도망쳤어요. 마을에서는 방위군을 거지 떼라고 불렀구요. 지당한 호칭이지요.
하루는 마을 어느 집에서 환갑잔치를 벌인다는 정보가 들어와 우리 훈병50여명이 몰려갔어요.
우리가 가니까 벌써 그 특이한 악취가 잔칫 집안에 확 퍼졌어요. 손님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들던 음식을 멈추고 더러는 구역질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자리를 떠버리데요. 우리는 이 때다하고 잔치상으로 우르르 몰려가 떡이니 국수니 마구 집어먹었어요. 이렇게되니 손님들이 혼비백산해서 모두 뒷산으로 올라가 버리고 집주인은 국민 방위군 거지 때 때문에 오늘 잔치를 망쳤다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사홀 굶으면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격으로 우리는 완전히 환장을 한거예요.

<방위군 냄새만 나면 꽁무니>
하여간 잔치상에 놓인 간장까지 싹 비워버렸어요. 이날 밤 4명이 죽었습니다. 굶주린 창자에 일시에 너무 쓸어 넣어서 창자가 터지고 토사광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3월 중순에 우리는 또 떼를 지어 조개나 달팽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낙동강가로 나갔어요. 마침 꽤 큰 어선이 건조되어 젯상을 차러놓고 무당이 무슨 푸닥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젯상에는 떡·고기·과일 등이 수북이 놓여 있어요. 우리 눈에는 먹을 것 밖에는 안 띄니까. 그래도 금세 덮칠 수는 없어서 무당이 한창 신이 나서 주문을 외는 틈을 타서 구경꾼 사이를 슬슬 비집고 들어갔어요
예의 고약한 냄새가 풍기니까 구경꾼들이 웅성대고 무당도 슬그머니 굿을 멈추어 버립디다. 우리는 이틈을 타서 아예 젯장을 송두리째 받쳐들고 2백m 달아나서 삽시간에 모두 먹어 치웠어요 .무당은 맥이 풀리는지 보따리를 챙겨 굿을 중단하고 가버리데요. 이렇게 굶주림과 열병 때문에 죽은 훈병들은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양정희씨(당시 남해도 방위군 제17교육대 훈병·현 중앙일보 춘천주재기자·39) <50년12월말께 전북 순창에서 방위군 소집 영장을 받았습니다.
군에서 모인 수천 장정이 10일 분의 식량을 걸머지고 기간요원들의 인솔하에 도보로 6일만에 진주에 도착했어요. 여기서 다시 남해도로 건너가서 남해 중학교에 있는 방위군 제17교육대 제2대대에 입대했지요. 제2대대에만 1천여 명이 한 교실에 2개소 대씩 1백20명이 수용됐어요.
총도 교육도 없으니까 밥만 먹으면 군가나 부르며 소일했어요. 그러나 이것도 처음 며칠동안이지 차차 영양부족으로 기운이 빠지니까 멍하니 누워지냈어요. 먹은 것이라고는 한끼에 조그만 주먹밥 한 개와 비료에나 쓰는 해초가 든 소금국 뿐이었으니까요. 한 달 안에 모두 얼굴이 부어 올라 산송장처럼 되고 용변은 10일에 한번이 고작이었어요. 나도 완전히 기력을 잃어 두 달 후에는 환자실에 들어가 가마니를 덮고 누워 있었습니다.
3월초에 여수로 가서 예비사단에 편입한다고 해서 배를 타고 그 곳에 상륙했어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여수 사람들이 거지나 다름없는 우리를 음식을 주며 아주 따뜻이 대해 준겁니다. 그런데 예비사단에서는 이런 거지 환자들을 한사람도 받을 수 있다고 해요. 이 때r 누구의 선동도 없이 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가자』소라와 함께 수백 명의 집단이 순천을 향해 떠났어요. 엄격히 따지면 우리는 탈영병들인데 순천역에 와 보니「귀환장정환영」이란 현수막이 나부끼고 지방 유지들이 마중 나와 있어요.

<일보조작 70만명까지 늘기도>
참 알고도 모를 일입디다. 여기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는데 건강을 회복하는데 보통 4, 5개월이 걸렸어요.
방위군의 과오는 직접적으로는 수십만 장정을 신체적으로 망쳤다는데 있겠으나 이에 못지 않게 국민간에 군대 기피풍조를 조성한 해독입니다. 전시 하에 널리 퍼졌던 징집기피현상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었지요.>
한편 정부는 방위군 처우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자 2월17일에 방세이상의 장정은 귀향조치를 취하고 이어 4월30일에 국회에서 방위군해체 안이 가결되자 방위군을 해산,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굶주린 장정들이 귀향하는 동안 많은 희생자를 냈다. 「죽음의 대열이 이나 「해골의 행렬」이란 말도 이대에 나온 것이다. 다음은 이 귀향장정들을 구호한 관계자의 증언.
▲신동우씨(당시 충북 계엄민사부장 대령·예비역공군준장·현 경향신문전무·51) <나는51년1월13일자로 육본 국민 방위국의 인사처장으로 취임했어요. 나의 주요직책은 방위군사령부에서 매일 일보를 올리면 확인해서 상부로 올리는 거예요. 내가 일보에 확인도장을 찍어야 방위군에서 쌀과 돈을 타갈 수 있었어요. 그 때의 일보는 심할 대에는 방위군 숫자가 70만까지 올라오기도 했어요.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여서 몇 번 도장을 안 찍었어요. 그럴 때마다 현역준장인 사령관 김윤근 장군은『준장이 결재 올린 왜 일개 대령이 깔아뭉개느냐』고 노발대발했어요.
결국 이러다가 나는 2월 중순에 본부에서 충북 계엄민사부장으로 밀려났어요. 얼마 안 있어 전세는 호전돼 38이남은 우리가 다 수복했고 말썽 많던 방위군이 해체, 장정들에게 귀향령이 내립데다. 그런데 강정들을 집에 돌려보내는 것도 큰 문제였습니다. 이들의 구호사업이 나의 주요직책이었어요. 국도는 군용으로 복잡해서 방위군들은 간도로 귀향하도록 했어요. 그래서 대구를 출발한 강원도·경기도의 장정들은 황간∼영동엘 들어서서 청주∼진천∼죽산을 경유해 갔어요. 워낙 교육대에서 골병이든 데다가 걸어서 북상하는데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어요.

<돌아가는 길에 무수히 죽어>
부인회·여학생들을 동원해 30리 또는 50리마다 구호소를 차리고 민가에서 쇠 목욕통을 떼다가 미역국을 끓여 주었어요. 그리고 이발사를 징발해서 머리를 깎아주고 환자는 도립병원에 입원 시켰구요. 화성사람은 화성 사람끼리, 가평 사람은 가평 출신끼리 삼삼오오 떼를 지어 걸어오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시찰 나갔다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장정을 보고 두드려 깨우며 나의 신분을 말했는데도 『쳇, 네 까짓게 무슨 상관이냐』며 외면을 합디다.
그래도 나는 위로할 말이 없었어요. 확실한 숫자는 모르지만 이렇게 충북을 지나간 강정이 5만 가량 됩니다.>
◆주요일지(1951년2월19·20·21일)
※2월19일 ▲원주북방서 중공군 3개 사단 격퇴 ▲부산서 38선 정지세 배격국민대회
※2월20일▲적, 서울서 퇴각개시 ▲미 해군, 원산에 함모사격 ▲「맥」원수, 원주 전선시찰 코 전황에 만족표명 ▲언더우드 박사 사망 ▲임병목 대사, 「스탈린」성명 반박
※2월21일▲「유엔」군, 중부전선서 공세 재개 ▲아군의 한강도하 기도실패 ▲소련, 중공에 5백대의 공군기 제공설 ▲영국,「유엔」 군의 38선 재 돌파시 지지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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