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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제20화)전문고교|김효록(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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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체육활동>
한국이 오랜 쇄국에서 벗어나 개화함에 따라 청년들이 구미문화를 동경하게되고 구미인의 운동경기에도 반하게 됐으며 일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그것에 반발하여 일인을 굴복시키는 방편은 운동뿐이라고 생각하여 체육부의 활동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학교당국은 이러한 체육활동의 의의를 감안하여 선수의 특별입학을 허가했고 체육부활동에 경비를 보조하여 보·연전은 한국체육계의 쌍벽을 이루어 두 학교의 축구 및 농구대항전은 그전에도 기술면에 있어 최고봉이었고 인기도 대단하여 서울장안의 운동 「팬」이 총동원되었다.
한국체육계를 개척, 영도하고 좋은 전적으로 침체한 국민의 사기에 자극을 주었으며 유능하고 격조 있는 체육지도자를 다수 배출한 이들 전문학교의 체육활동은 다음과 같다.
보전운동부의 남상은 21년에 결성된 정구부의 출전이다.
이에 이어 축구부·농구부·「럭비」축구부·탁구부 및 배구부 등 구기부와 육상부·수상부 및 빙상부 등의 기본체육부 그리고 역도·유도부·검도부 등이 생겼다.
보전에 축구부가 언제 결성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처녀출전은 24년 10월 조선체육회주최 제5회 전 조선 축구대회 때였다.
보전축구 「팀」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것은 26년께 평양태생의 임용업이 입학한 뒤 엄동원(엄훈) 김원겸 등을 권유, 입학시켜 「팀」을 강화한 이후였다. 보전은 1931년 이후에는 당시축구의 왕도라 불리던 평양에 원정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고 이후 1935년까지 김용식·배종호 등 우수선수를 배출하여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까지 거두었다.
이후 해방 전까지 국내 「톱·클라스」에 위치했으나 청진·성흥 등의 강호 「팀」(청진 「팀」은 1차, 성흥 「팀」은 2차 전 일본 패권을 잡았었다)과 좋은 경기를 벌였고 <김용식은 제14회 「베를린」「올림픽」에 일본대표선수로 선발됐으며 박규정·민병대 등은 동아대회 일본에 대표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학교농구 「팀」은 보전에 처음 생겼다. 28년 김덕은·김화집·김화영·황백수·허좌근 등에 의해 조직되어 다음해 제1회 전국전문학교 농구선수권대회에 처녀출전 우승했으나 상해원정에서 1승 3패를 기록하는 등 저조했고 37년부터 39년까지 3년간은 전 일본 종합선수권 대회에서 3년 연승하기도 했다.
이 당시 활약했던 선수는 조득준·이호선·오수철·안창건·최해룡·이용항·신광호 등이었고 40년 이후에는 신봉호·윤두섭 등이 활약했다.
고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운동부는 정구부로 21년에 서정호·이한준·박상근·김정탁 및 오병근 등에 의해 결성됐다.
초창기에는 김기준·김명선·오명찬·김정환·장선윤·정인진 등 명선수가 나왔으나 전국을 석권하지는 못했다.
33년부터 허병예·천효근·김종수·신경철·성태룡 등이 일본 명치 신궁대회에 참가하여 패권을 잡았고 다시 이세신 궁봉납 전 일본정구대회에 우승했다,
당시 천효근·허병예 조는 국내최강의 「콤비」였다.
39년에 발족한 보전산악부는 묘향산·구월산·오대산·설악산 등을 두루 탐험했고, 42년 7월 20일에는 이종완을 단장으로 김삼행·최긍식·김득관 등 9명이 우리 나라 산악인들이 한번도 탐험하지 못한 백두산 천지탐험의 길에 올라 혜산진∼삼지연∼신무성∼무대봉∼천지∼무두봉∼삼차로∼무포∼무산∼고무산∼청진의 「코스」를 18일간의 강행군으로 답사했다.
이 탐험결과는 일반의 요청에 따라 화신 등 두 곳에서 사진전시회도 열었다.
연전은 21년 축구부를 만들었으나 첫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형민(야구로 유명했던)·정운수·곽주벌 등이 활약하던 25년이었다.
같은 해 제7회 전 조선축구대회에 출전, 우승했고 조선축구단에 이형민·김윤기 두 선수가 선발되어 일본원정에서 5승 3무승부의 좋은 성적을 얻기도 했다.
1927년은 연전축구가 최강을 자랑하던 해로 보전과는 3전 3승이었고 당시 무적이라던 조선축구단을 7대 0으로 눌러 우승하기도 했다.
국내 「팀」을 모두 제압한 연전 「팀」은 28년 상해로 원정, 4전 4패의 부진한 전적을 올린 데다 일부 선수들이 술을 마셨다하여 축구 「팀」이 해체되다시피 했고 29년에는 진전에 결승에서 3대 1로 패해 보전은 「팀」이 창설이래 첫 우승을 하게됐다.
30년에 제11회 전 조선축구대회에서 다시 결승에서 보전을 3대 2로 물리쳤으나 이후에는 일진일퇴의 전적이었고 오히려 보전이 강세였다.
35년 연·보전 축구 「팀」이 합세한 경성축구단은 제1회 동 일본 종합선수권대회와 명치 신궁대회에서 우승했고 연전축구 「팀」은 위혜덕·이용담·김성우·이용일 등의 활약으로 35∼37년까지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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