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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 화맥 진도씻김굿 명인들 … 대물림 유전자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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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요즘 어딜 가나 단풍이 절정이긴 하지만 진도군 운림산방(雲林山房)의 단풍은 정말 빼어났다. 지난 주말, 밀리고 막히는 도로를 헤집느라 가는 데만 여섯 시간 가까이 걸렸어도 다녀오길 잘했다 싶다. 단풍나무 씨앗은 프로펠러 모양으로 생겼다. 모든 씨앗은 나름의 비법으로 최대한 널리 퍼지고자 한다. 바람을 타거나, 꼬투리를 터뜨리거나, 짐승 털이나 사람 옷에 붙어 이동하는 방법들이 있다. 단풍 씨는 두 장의 날개로 빙빙 돌며 하늘을 난다. 얇다가 두꺼워지는 곡면 모양의 날개에는 대단한 공기역학이 담겨 있다고 한다. 회전하는 모습이 몇 년 전 사이언스지(誌) 표지사진으로 실린 적도 있다.

 자신의 DNA를 퍼뜨리려는 번식의 비원(悲願)은 모든 생명체가 공통이다. 그러나 씨라고 다 같은 씨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좋은 씨가 있고 허접스러운 씨가 있는 법이다. 운림산방에서 DNA를 떠올린 것은 이곳이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의 터이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애제자이던 소치는 1856년 스승이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낙향해 운림산방을 짓고 살았다. 그로부터 시작해 2대(미산 허형), 3대(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임전 허문), 그리고 지금의 5대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 30명 넘는 화가가 배출되었다. 이래서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말이 생겼다.

 토요일인 2일 저녁은 마침 ‘2013 진도 무형유산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인 진도씻김굿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였다. 죽은 이의 영혼이 이승의 한을 풀고 편안히 떠나도록 기원하는 굿. ‘안땅’부터 ‘종천’에 이르기까지 두 시간가량 넋을 놓고 구경했다. 여기서도 DNA다. 씻김굿 출연진은 예외 없이 고 박병천(1933~2007) 인간문화재의 제자들이었다. 박병천의 8촌 동생(박병원)과 장남 박환영 등 아들딸도 합세했다. 1박2일의 이번 진도 ‘풍류로드’ 여행을 기획한 진옥섭 한국문화의집(KOUS) 예술감독은 “이런 게 바로 개비(집안 대대로 예술을 업으로 삼는 예인들)의 힘”이라며 “한 사람 80년으론 모자라고, 몇 대에 걸쳐 유전자를 갈고닦아야 최고의 내공이 발휘된다”고 말했다.

 새삼 명가(名家) 또는 명문(名門)이라는 말을 되새겨 본다. 우리는 주로 학문이나 부(富) 측면의 명가를 떠올린다. 그나마 자타가 공인하는 명가다운 명가는 몇 안 된다. 전통예술 분야는 아주 드물다. 소치는 옛적부터 상류층의 대접을 받던 서화 쪽이라 다행인 편이다. 진도씻김굿 집안은 괄시당하던 무속인에 속했고, 굴곡 많은 현대사까지 겹쳐 대대로 힘든 세월이었다. 그들도 기여도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글=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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