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두려움 없는 도전 … 오직 열정 하나로 패션의 전설을 쓰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7호 06면

한국 패션 디자이너 1호 노라노(Nora Noh·85) 여사를 소재로 한 다큐 영화 ‘노라노’ 가 10월 31일 개봉됐다. 마침 서울 신문로 신문박물관에서는 ‘Nora Noh-자료로 보는 노라 노 발(發) 기성복 패션의 역사’ 전(10월 30일~12월 15일)도 시작됐다. 당시 사진과 드로잉, 신문 기고물 등을 통해 그의 패션사를 조명해 보는 행사다.

다큐 ‘노라노’ 실제 인물, 대한민국 1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왜 갑자기 노라노일까 싶은 이도 있겠지만 사실 영화든 전시든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여사의 60주년 전시를 기획했던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의 말이 이유를 대신한다. “코코 샤넬, 소니아 니켈,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과 같은 선상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나라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슬펐다.” 그러니 신진 해외 디자이너의 프로필까지 줄줄 꿸 만큼 패션에 관심이 많아진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설적 존재가 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충분하다는 얘기다.

노라노라는 이름 앞에는 늘 ‘최초’가 붙었다. 그래서 “1947년 내 나이 스무 살,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영화 속 첫 내레이션은 마치 “그의 나이 스무 살, 한국 패션계가 시작되었다”는 말로 치환돼도 무방하다. 1947년 미국 프랭크왜건 공대로 유학을 떠나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귀국해 1952년 서울 명동에 ‘노라노의 집’이라는 의상실을 차렸다. 전후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그때 고급 맞춤복을 제작하며 국내에 처음 ‘패션’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맞춤복을 만들며 축적된 고객들의 신체사이즈 통계를 바탕으로 미리 의상을 만들었고, 이것이 국내 여성 기성복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1956년엔 반도호텔 야외 옥상에서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으며, 1963년엔 디자이너 기성복을 처음으로 본격 제작했다. 그가 디자인한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패션 등은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럼에도 영화와 전시를 보며 알게 되는 건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화려했던 경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선구안적이고 도전적이었던 노라노의 행보, 서구 사회의 교양과 사고를 전달하고자 했던 모더니스트의 역할이다.

가령 영화 속 재연으로 소개되는 패션디자이너 이전의 노라노는 일본군 위안부 징집을 피해 열일곱에 시집을 갔다 2년 만에 이혼을 결심하는 당찬 여성이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청춘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노명자’라는 본명 대신 ‘노라’라는 이름을 스스로 선물했다. 학창 시절 즐겨 읽던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보이지 않는 길을 선택하면 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인데, 뻔히 보일 길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죠.”

이후 그는 보이지 않는 길을 무작정 달려갔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갖가지 시련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망할지도 모를 기성복을 “더 저렴한 가격에 더 멋진 옷을 만들어, 이제 막 사회에 들어선 많은 여성을 응원하고 싶었다”며 제작했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순간에도 화장을 하고 매니큐어를 칠했고, 취조실에서 담배를 꺼낼 정도로 담대했다. 아마도 이 모든 걸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자신처럼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비슷한 여성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최은희·엄앵란·최지희 등 배우들을 비롯해 가수 윤복희, 김인자 한국심리상담연구소장 등은 지금까지도 노라노의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다.

영화를 만든 김성희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노라노의 이야기는 삶에 당당히 맞서며 ‘제 2의 노라’를 꿈꾸는 모든 여성을 위한 영화”라고 했다. 그의 인생이 단지 패션(fashion)이 아닌 패션(passion)으로 채워졌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