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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제19화 형정반세기(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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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어학회 사건>
30년대 말부터 일본어 사용 등 강력한 동화정책을 편 일제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말과 글, 얼의 말살을 꾀했던 사건으로 조선어학회사건을 손꼽을 수 있다.
37년부터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이른바 황국신민서사를 집회 때마다 제창케 하고 우리말 교육의 폐지와 일본어 상용강요, 잇따라 창씨개명실시, 신사참배 등으로 민족의 문화 및 사상을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 해 왔었다.
또 전시임을 내세워 조선사상범 관찰령을 만들어 민족운동자를 요시찰인으로 감시대상에 올렸고, 사상범 예비구금령으로 혐의만으로 각종 민족단체를 탄압, 수양동우회사건 「수양동우회사건」「흥업구락부사건」, 「기독교반전공작사건」 등으로 지식인과 종교인을 대량으로 검거해온 터였다.
제일 마지막 대상이었다는 조선어학회사건은 42년 여름 한 여학생의 일기책 속에서 빠져 나온 한 줄도 채 못되는 글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함남 전진 정거장에 검문 나왔던 일본인 형사 심택은 거동이 수상한 박병엽을 검거했으나 별다른 혐의를 잡지 못하자 그의 집을 수색하던 중 박의 조카 박영옥(당시 함흥 영생고등 여학교 4년)의 일기 속에서 『국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는 귀절을 발견했다.
트집이 없어 고심하던 홍원 경찰서 고등계 주임 안전임(본명 안정묵)은 일기 속의 국어는 일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처벌했다면 학교당국의 반국가적 처사를 다스려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 박양의 담임이자 조선어 학회에서 일을 보고 있던 정태진을 검거했다.
당시 함남 경찰부는 전국 경찰 중 사상범을 다루는데 제일 우수하다는 평이었고, 특히 홍원 경찰서 고등계는 그 으뜸으로 소문났었다.
상부의 허락을 얻자 홍원 경찰서의 형사 11명이 경성에 출장,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에 대한 첫 검거에 나선 것은 42년10월1일 새벽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일이라 해서 공휴일이었다.
1차로 이중화 장지영 한징 이윤재 최현배 이극노 이희승 정인승 권승욱 이석린 등 11명이 체포되어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함흥과 홍원으로 압송됐다.
이어 여러 차례에 걸쳐 모두 33명이 붙잡혀왔다.
일본 경찰은 압수한 원고 카드에서 태극기 「이왕가」「대궐」「백두산」「단군」「무궁화」 등의 어휘에 대한 주석이 불요하며 반국가적이라고 트집 잡았으며 심지어 「경성」의 주석이 「동경」보다 길다고 따졌다.
1차로 검거된 11명 중 정인승·이극노·권승욱 3명은 홍원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는데 권·정·이 순으로 불려나가 l주일 내지 10일씩의 고문을 연거푸 당했다.
처음 불려 나가면 우선 길이1m쯤 되는 네모난 고무몽둥이로 벗겨놓고 1시간 가량 후려갈긴 뒤 물 먹이기·잠 안 재우기·비행기 태우기 등의 방법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이렇게 하기를 1주일쯤 당하자 온몸이 시퍼런 맷자국으로 마치 뱀 모양의 문신을 놓은 것처럼 온몸에 얼룩이 졌다. 당시 50세의 고령으로 끝까지 자백을 거부하던 이극노는 10일 동안 어찌나 혹독히 당했던지 피투성이가 되어 들것에 들려 왔다. 당시 일본 경찰의 고문은 악명 높은 것이었는데 특히 조선인으로 이름을 바꾸어 일제주구 노릇의 하던 안전임, 윤동휘 원신원동철 (이상 홍원 경찰서) 자전건치(김모) 송산무(이모) 대원병훈(이상 함남 경찰부) 등은 사람백정으로 불리우는 잔인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고문방법을 마치 전투에 비유, 한겨울에 발가벗긴 뒤 얼음물을 등에 붓는 것을 해전, 죽도나목 총으로 가슴과 등을 찧는 것을 육전, 비행기 태우는 것을 공중전이라 불렀다.
또 33명의 피의자들이 지식층임을 악용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얼굴 절반에 먹칠을 하게 한 뒤 등에다가 일본어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용서해라』라고 써 동료들 앞에 돌아다니게 하는가하면 매를 들고 동료 피의자를 때리게 하는 잔인한 방법을 썼었다.
만1년 동안의, 경찰조사를 끝낸 뒤 이들은 예심에 넘겨지며 함흥 형무소로 이감됐다.
예심이란 내란죄나 사상범같이 중요 피의자들을 검사의 기소로 직접 재판에 회부하기 전 1차 심사를 하는 제도로, 표면상으로는 사건을 신중히 처리하기 위해서라지만 일제 36년 동안 이를 핑계로 장기구속을 합법화하여 골탕을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함남형무소에서의 옥살이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강요했다. 특히 패색이 짙어진 때여서 식량은 물론 각종 물자가 달렸다. 식사량은 2분의 1로, 나중에는 3분의 1로 줄었다.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죄수가 한둘이 아니었는데, 이감된지 두 달 만인 43년12월8일에 이윤재가, 이듬해 2월3일에는 한징이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끝내 숨졌다. 죄수들은 한겨울인데도 맨발이었고 간혹 새끼줄로 발을 둘러 눈길을 걷곤 했다.
기소됐던 16명 중 정식재판에 회부된 것은 12명으로, 이들의 변호는 한격만, 박원삼(작고), 유태설(납북) 등이 맡았었다. 45년1월18일에야 함흥 지방법원에서 관결선고 공판이 열려 이극노에게 징역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6월, 정인승·정태진 각각 2년 김도연·이인 등 나머지 7명에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형이 떨어졌다.
상고심 계류 중 8·15를 맞아 출옥한 이들이 함흥유지 모기윤씨의 마중을 받은 것은 17일 아침이었다.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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