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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평전의 재발견 … 이어령으로 보는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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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창조의 아이콘, 이어령 평전
호영승 지음
문학세계사, 396쪽
1만2600원

이어령 하면, 상반되는 이미지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같은 글을 읽을 때면 글 솜씨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눈부시게 명징한 비유, 예민한 감수성이 담긴 글만 보면 빼어난 에세이스트다. 1934년생이지만 여전히 넉 대의 컴퓨터와 최신의 운영 체제로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영원한 청년이 떠오른다.

 한데 이뿐이 아니다. 『저항의 문학』으로 한국비평계를 뒤흔든 문학평론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저술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일본을 놀라게 한 한국의 지성, 72년 문학사상을 창간한 편집기획자, 초대 문화부 장관, 88올림픽 행사를 진두지휘한 문화 기획자…. 이어령은 한두 가지 수식어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대체 이어령의 이런 불가사의한 열정과 성과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사석에서 “평생 자서전은 쓰지 않겠다”고 했다지만 동시대인들에게 그 내밀한 삶과 정신세계는 여간 궁금한 게 아니다. 그 비밀을 『창조의 아이콘, 이어령 평전』이 밝혔다. 작가 호영송은 최초의 이어령 평전을 통해 가까이에서 보고 겪고 느낀 인간 이어령의 모습, 한국 문단과 평단 그리고 일본 지식인에게까지 미친 그의 영향과 성과를 깊이 있게 파헤친다.

이어령(79) 전 문화부 장관은 “스스로 쓴 자서전은 자칫 자기 변명에 함몰되기 쉽다”며 소설가 이광수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난 자서전 안 쓴다. 내 책과 작품이 자서전이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이어령은 56년 ‘우상의 파괴’라는 거침없는 평론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신선함과 충격을 동시에 안겨준 글에서 김동리를 ‘미몽의 우상’, 황순원·조연현·염상섭·서정주 등을 ‘현대의 신라인들’이라며 신랄하게 비평했다. 자칫 센세이션으로 기억될 주장은 그러나 이유 있는 분노였다.

 “시는 표어에서 끝나고 소설은 야담에서, 평론은 정실과 의전문으로 귀결되는 적막한 한국문단”에 암담함을 느낀 이어령이 토해낸 절규였다. 소설가 이병주는 “한국의 문예평론은 이어령의 비평 활동으로부터 비로소 문학이 되었다”라고 했다던가.

 이어령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혹자는 한낱 베스트셀러라 하겠지만 그때까지 경직된 사고가 지배하던 한국 사회에 한바탕 인식전환을 불러온 책이다. 훗날 20세기 중반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문명비평서로 평가받을 작품이다.

 아직껏 일본의 대학입시와 입사시험에 등장할 만큼 주목받는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문제적이다. 일본 지식계를 충격에 빠트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극일(克日)에 이르렀다. 또 듣는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박학다식한 달변의 말솜씨, 혈육의 고통 앞에서 신에게 귀의한 내밀한 심경 등 사적인 모습도 담겨 있다. 이처럼 책은 열정과 창조의 정신을 지닌 인간 이어령과 갈등과 변화의 기로에 섰던 20세기 한국의 지성사가 얽혀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사실 평전이란 개인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조우하는 데서 그 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한 인물을 통해 그 시대의 전모를 만날 수 있기에 인문학의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로맹 롤랑이 『베토벤의 생애』라는 평전을 쓴 것도,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역사학자 E H 카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평전을 집필한 것도 그러니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평전은 한 인물을 따라가며 시대와 역사라는 전체상을 살피는 작업이라 접근이 만만치 않다. 개인의 업적은 물론 단점까지 입체적으로 서술하려면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 등은 기본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집필에도 여러 해가 걸린다. 때문에 아쉽게도 국내에서 평전은 여전히 가능성만 모색 중이다. 인물에 대한 다면적 평가를 용인하지 않아 논란에 휩싸이는 일이 다반사고 평전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시장성도 불투명하다. 그나마 최근 1~2년 사이 국내 작가들이 쓴 평전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으며 『김대중 평전』처럼 상업적 성공을 거둔 책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번 책 역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오랜 집필 시간을 들여 최초로 이어령 읽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이어령이라는 거인의 역동적인 발자취를 따라가며 역사로 전해질 20세기 한국의 문화적 흐름을 생생하게 느껴볼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한미화  책과 출판에 관해 글을 쓰고 있다.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 『베스트셀러 이렇게 만들어졌다』 등의 출판시평과 『잡스 사용법』 『책 읽기는 게임이야』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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