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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신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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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마의 신화에 「야누스」라는 신이 나온다. 머리의 앞뒤에 두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 신이다. 그는 따라서 앞과 뒤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어느 의미에선 이런 「야누스」 신과 비슷한 면을 가졌다. 인간은 앞과 뒤, 곧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토인비」도 말한 적이 있다.
역사가다운 말이다. 그렇지만, 실지로는 사람들이 「야누스」처럼 앞과 뒤를 동시에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앞과 뒤, 그 어느 쪽에 치우치기 쉽기 때문이다.
가령 생일을 맞는 사람을 상상해보면 좋을 것이다. 어렸을 때, 젊었을 때의 생활은 그저 기쁘기만 한 날일 것이다. 화려한 미지의 세계에 한발 더 내디딘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돌아다 볼 과거도 별로 없다. 자연 앞에만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앞과 뒤를 어느 만큼이라도 함께 돌아볼 수 있게끔 되면 그는 그때 그만큼 늙어있는 것이다. 노년기에 맞는 생일처럼 서글픈 것도 없다. 앞날에 기대할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자연 좌절과 환멸과 추억에 찬 과거에 묻혀 살게된다.
만약에 「야누스」 신이 신문을 읽는다면 어떤 신문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오늘 본보는 지령 1860호로 창간 여섯 돌의 생일을 맞는다. 앞과 뒤를 알맞게 내다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른 셈이다.
지난 6년 동안 모든 게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만족스런 신문을 만들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겸허한 마음으로 좌절과 계획, 후회와 기대, 자랑과 포부를 알맞게 저울질할 수 있게 된 것만을 기쁘게 여길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문의 사명을 가늠해 본다.
나라 안팎으로 격동의 물결이 굽이치던 지난 6년 동안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그보다 몇 곱절 역겨운 어떤 파동이, 어떤 소용돌이가 우리에게 엄습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때 신문은 「오늘」만을 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불멸의 「야누스」 신에게도 그저 「오늘」의 연속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오늘」은 어제나 내일과 연속된 것이었다.
우리는 자칫 「오늘」에만 매어 살기 쉽다. 「야누스」처럼 앞과 뒤를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인지, 「분명한 것」은 「오늘」뿐이기 때문인지. 그러나 「오늘」이란 어제의 결과인 동시에 내일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가 「야누스」 신처럼 될 수 없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가장 아쉬운 신문이란 「야누스」처럼 오늘만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일의 의미를 찾아내 주는 것이 아닐까. 창간 여섯 돌을 맞아 그래서 우리는 새삼 인간 이성의 본질적 발전지향성과 도덕적 선성에 대한 신뢰심을 불어 일으키며 밝은 내일에의 희망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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